전문직 탈북자들 할일 없어 헤맨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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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직업 못찾아 ‘국가적 낭비’ 불러

 
한국에 막 도착했던 4년 전을 생각하면 한명선씨(51)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북한에 있을 적 그녀의 직업은 화학 교사. ‘거친 남학생들도 확 휘어잡을 정도로’ 화술이며 통솔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도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유능한 교사였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 입소한 뒤 한씨가 맨 처음 들은 말은 ‘북한에서의 삶은 깡그리 잊으라’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영화를 누렸건 모두 잊고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 취직한 곳은 한식당. 지하철 공사장 인근의 속칭 ‘함바집’에서 일하게 된 한씨는 날마다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설거지 같은 궂은일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학생 대신 공사장 인부들을 상대하게 된 것도 ‘인생 공부려니’ 생각했다. 그렇지만 ‘샐러드 좀 갖다 달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창피를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자존심 강한 한씨는 이 때문에 요리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요리 그 자체보다 ‘샐러드’ ‘스테이크’ 같은 낯선 요리 이름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 뒤 그녀가 새로 얻은 직장은 가방 공장. 그러나 그곳도 곧 그만두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고되게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가 너무 헐했기 때문이었다. 딱 한번, 정부 산하 공단에서 상담 전화를 받는 사무직 일자리가 생긴 일도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아줌마, 억양이 왜 그래요? 조선족이에요?”라며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한씨는 특수 사례가 아니다. 전문직 출신 탈북자. 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남한 사회에서 배회하고 있다.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00~2004년 8월 한국에 들어온 전문직 출신 탈북자는 총 1백28명(통일부는 의사·한의사·통역원·교사 출신을 전문직 출신 탈북자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같은 기간 입국한 탈북자 4천7백여명의 2.7%에 달한다.
그런데 1백28명 중 본래 직업을 되찾아 현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단 2명뿐이다. 한 사람은 한의사 석영환씨(38·백년한의원 원장)이고, 또 한 사람은 교사 천정순씨(40·성지고 교사)이다. 이밖에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 시내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김 아무개씨가 있다.

이들은 탈북자 사이에 ‘억세게 운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 그러나 운이 거저 온 것은 아니라고 석영환씨는 말한다. “(면허 응시 자격을 얻기까지) 통일부·보건복지부를 오가며 얼마나 싸우고 다녔는지 모른다. ‘안되면 청와대 앞에 가 청소라도 하며 내 억울함을 호소하겠다’고 악을 쓴 것도 여러 번이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문제는 정부 부처마다 따로 노는 자격 인정 기준이었다. 북한에서 의대나 한의대를 졸업했다고 교육부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보건복지부로부터 다시 자격 인정을 받으려면 북한에서 받은 의사·한의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자기 몸 하나 빠져나오기 급급했던 탈북자들이 자격증까지 챙겨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석영환씨는 군대 복무 중 휴전선을 통해 월남했기에 군의관 경력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랬어도 자격증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그에게 자격증을 주는 대신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주었다. 그것도 전제가 따라붙었다. 일단 그는 서울 시내 한의대에서 전문가들로부터 구두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자격 시험 볼 기회라도 달라”

 
이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의사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말에 석씨는 자존심이 상했다. “평양의대를 나오고 김일성장수연구소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는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 나중에 통일되면 북쪽 동료들한테 낯 뜨거워 어떻게 고개를 드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그는 구두 테스트와 자격 시험을 치른 뒤 2002년 2월 한의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상황이 이러니 웬만한 전문직 출신 탈북자들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다. 교사 쪽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의사나 한의사 출신 탈북자가 자격 시험 응시 기회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현행 의료법상 외국 대학 졸업자에 대한 특례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외국 대학 졸업자에 준해 탈북자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교사에게는 이런 특례 조항이 아예 없다. 현행 교육공무원법은 오직 국내 대학 졸업자만을 임용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유일한 탈북자 출신 교사인 천정순씨 또한 정식 교사가 아니다. 대안 학교인 서울 성지고에서 수학 교사로 4년째 일하고 있는 천씨는 “임용 고시를 볼 방법이 있는지 그간 백방으로 알아 봤다”라고 말했다. 방법은 한 가지, 사범대에 편입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자녀를 키우며 대학을 다시 다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탈북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등록금도 족쇄가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지원법에 따르면, 탈북자에 대한 학비 지원은 35세까지만 가능하다.

천씨는 낙담했다. “똑같이 일하고 가르쳐도 임시 교사는 정식 교사에 비해 보수가 헐하다”라는 그녀는 무엇보다 임시 교사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못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했다. 그래서 천씨는 우회로를 택하기로 했다. 올해 천씨는 서울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상담심리사 자격을 취득한 다음 탈북 청소년을 위한 상담 교사가 되는 것이 천씨의 새로운 꿈이다.

엘리트 탈북자를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교사 출신 탈북자 10여 명과 함께 남북교원통일교육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는 조휘제 회장(서서울생활과학고 교사)은 “교사 출신 탈북자들을 가까이서 접해 보니 정말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이런 우수 자원들이 한국 사회에서 사장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남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지적한다. 지난해 한의사 자격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달라는 탈북 한의사 김지은씨의 입법 청원을 국회에 소개했던 김의원은 “전문직 출신 탈북자들을 우리 사회의 2등 국민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정부 부처 간에 정책 조율이 필요하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실제로 석영환씨나 천정순씨 같은 소수를 제외하면 전문직 출신 탈북자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2등 국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의사 출신 ㄱ씨는 최근 미국에 밀입국하려고 시도하다 강제 송환되었다. ㄱ씨는 한국에 온 뒤 세차장 잡역부 등을 전전하다가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컴퓨터 수리공, 봉제공장 노동자, 식당 종업원…. 한때 북한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살던 이들의 현재는 누추하고 고단하기만 하다.

통일부·복지부 등 정부 부처 ‘나 몰라라’

이렇다 보니 한국 사회에 반감을 갖게 되는 탈북자도 많다. 북한에서 10여 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는 한 탈북자는 “식량 사정만 아니면 당장에라도 (북한에) 다시 가 교단에 서고 싶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탈북자는 “나름으로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우리조차 여기서 하바닥(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 한다면 누가 한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겠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관해 정부는 지금껏 방관만 하고 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관련 법 규정이 미비하고, 전문직 간에 남북 격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한 기초 조사가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해법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교사 출신인 한명선씨는 이같은 정부의 태도를 성의 없는 변명이라고 일갈한다. 정부가 성의가 있다면 탈북 청소년 학교 같은 데서라도 자신들을 교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한씨는 이렇게도 주장했다. “나중에 통일되면 북한 의료계·교육계를 남한 의사·교사 들이 몽땅 장악할 것인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 탈북 인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석영환씨 또한 통일 이후를 대비해 하루빨리 한국 정부가 이들 전문직에 대한 자격 인정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자격증을 그냥 달라는 게 아니다. 자격 시험에 응시할 기회라도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석씨는, 최근 탈북자로 구성된 탈북의료인협회를 만들어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탈북 여성 김지은씨(40)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을 온몸으로 실현한 맹렬 여성이다. 2002년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김씨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다단계 판매 조직에 걸려 정착금의 절반 가까이를 날렸다.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녀는 한편으로 비싼 공부를 했다고 자위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떻게든 다시 한의사가 되어 보자’는 오기도 함께 샘솟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부와의 지루한 싸움에 돌입했다. 북한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 그녀는 일단 통일부와 교육부에 학력 인정부터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부처는 ‘국내 한의대 6년 과정을 마친 자와 동등한 학력이 인정된다’는 인정서를 내주었다.
문제는 보건복지부였다. 복지부는 김씨의 진술만을 토대로 한 교육부의 학력 검증 결과는 믿을 수 없으며, 북한에서 발급된 의사 자격증이 없는 한 자격 시험 응시 기회도 줄 수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때 김씨는 처음으로 자살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살이라면 치를 떨었다. 김씨 아버지는 못 배운 건설 노동자이기는 하나 충성스러운 당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하늘이 꺼지는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중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고 온 뒤 바깥 세상에 충격을 받은 듯 부쩍 말수가 줄어든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그녀에게 “길이 있으면 (북한을) 뜨라”는 유언을 남긴 채 곡기를 끊어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그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넘어온 한국 땅에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자살 충동을 이겨냈다. “시간이 걸려도 좋다. 마음을 비우고 한의사가 되는 길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보니 건강 상담은 정식 한의사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김씨는 실향민을 위한 커뮤니티 사이트인 북마루(www.bukmaru. com)에서 건강 상담을 시작했다. 탈북자로서는 최초로 국회에 입법 청원도 냈다.
다행히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의 소개로 청원이 받아들여지고 통일부가 중재에 나서 김씨는 오는 3월 세명대 한의대 본과 1년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자격 시험 응시 기회를 얻는 대신 대학 편입을 하게 된 것이 편법일 수도 있겠지만 김씨는 오히려 낙관적이다. “양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어요? 남북한 한의학이 어떻게 다른지 이 기회에 익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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