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은 남을, 남은 북을 해방시켰다
  • 정나원(자유기고가) ()
  • 승인 2005.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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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베트남 전쟁 종전은 북부에 의한 ‘민족적 해방’이었고, 1986년 개혁은 남부에 의한 ‘경제적 해방’이었다. 종전 30주년을 맞는 베트남을 찾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 그곳, 특히 과거 ‘남 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찌민 시(옛 사이공 시)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02년 초부터 베트남 전역을 오가며 베트남 보통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논픽션 작가 정나원씨(40)의 기고를 싣는다. 정씨는 지금까지의 취재를 바탕으로 최근 <아버지의 바이올린>(새물결)을 펴냈다. 태국 방콕에 거주하고 있는 정씨는 현재도 베트남을 오가며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편집자).

 

1975년 4월30일, 20세기의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 날의 ‘사이공 함락’은 미국에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안겨 주었다. 반면에 사이공을 ‘해방’시킨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 월맹)과 베트콩(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베트남 역사에서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날 오전, 열다섯 살 소년이던 하이 씨(45·가명)는 사이공의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남 베트남군 최고사령관인 즈엉 반 밍의 항복 선언이 있은 직후였다. “그날, 온 가족이 모여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10년간 포화 소리 속에 살아온 우리는 종전 소식에 삶이 일순간 정지한 듯싶었죠.” 그는 그 날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종전 직후 삶은 전쟁 때보다 더 끔찍했다”


순간의 정적은 금세 흥분과 희열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에 사이공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통일의 깃발’을 나부끼며 사이공 시내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을 환호로 맞이했다. 북에서 온 병사들은 낡은 군복에서 호치민의 사진을 꺼내 시민들의 환호에 답했다. 심지어 일부 남 베트남 군인들은 군복을 벗어버리고 북베트남군과 함께 행진가를 부르기도 했다. 분단 20년 만에 남과 북이 다시 만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세계 최초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으로 생중계된 전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종전 소식을 라디오로밖에 들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과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5천 달러 대 50 달러였다. 미국은 베트남에 약 1천5백억 달러의 전비와 50만 병력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프랑스의 전철을 다시 밟았다. 마지막 철수하는 순간까지도 미국은 패배를 납득하지 못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종전 20년이 지나서야 전쟁 회고록을 내놓을 수 있었다. 저서에서 그는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고 고백했다. 

종전 후, 미국은 ‘공산 진영 대 자유민주 진영’의 충돌이라는 베트남전에 대한 기존 시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교정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베트남의 현실은 미국 측의 애초의 시각을 증명해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976년 어느 날, 하이 씨는 아버지가 서가에서 책 수백 권을 꺼내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잿더미로 사그라드는 책들을 바라보며 밤새 울고 계셨습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호찌민 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 베트남 정부 시절 출판된 ‘불온한’ 서적들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앉게 된 날부터 난 미처 태우지 못한 책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았어요. 암시장에 가서 쌀과 바꾸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남부의 한 지식인이 태우다 만 책들은 대부분 북부 지식인들에게 팔려 나갔다. 북부인들은 수십 년 동안 억제되었던 욕망을 남부에서 해소하고 있었다. 사이공이 호찌민 시로, 베트남의 국명이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명된 직후의 상황이었다.  

이어 1978년 무렵부터 남부 전역에 북베트남의 사회체제가 이식되었다. 강압적인 토지 개혁 및 집단농장화, 자본가 계급의 사유 재산 몰수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따른 배급제 실시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비단 대자본가나 대지주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중부 산간지역의 소규모 목재소도, 아오자이를 지어 파는 사이공의 양장점도 문을 닫아야 했다. ‘악의 뿌리’인 자본주의 요소를 철저히 뿌리 뽑기 위해서였다.

 
또한 베트남 공산당은 약 3백만 가량의 남 베트남인들을 강제노동수용소와 신경제지구으로 분리해 고립시켰다. ‘내부의 적’을 색출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미군이나 남 베트남 정부 측에서 싸웠던 고급 장교 가운데 9만여 명은 이미 1975년 초에 외국으로 빠져 나간 터였다. 따라서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진 이들 중에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 미군의 트럭을 몰았던 운전수들처럼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 있던 이들이었다.

신경제지구란 벼가 자라지 않는 정글이나 산간지역이었다. 그곳으로 이주된 남부인들은 맨손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개간한 뒤 옥수수와 감자로 연명해야 했다.

이 무렵 하이 씨의 가족도 메콩델타 지역의 신경제지구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상 개조를 위해 육체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8형제 중의 맏아들이었던 하이 씨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낮에는 아버지와 감자를 캐고 저녁 무렵이면 호찌민 시로 몰래 숨어들었다. 길모퉁이에 앉아 자전거 수리를 하고 껌을 팔았다. 거기서 번 푼돈을 모아 메콩 지역 농민들에게 몰래 쌀을 샀다. 하이 씨의 쌀은 사이공 시 진입로를 지키던 공안들에게 팔려 나갔다. 당시 어른은 한 달에 쌀 13kg과 돼지고기 500g을 배급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배급량은 배급제가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였다.       

 
종전 이후 상황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감정은 한결같다. ‘전쟁 때보다 더 끔찍했다’고 토로한다.  전쟁 때는 죽음까지도 버텨낼 정신적 힘이 있었다. 외세 배격과 통일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성립된 사회주의 체제는 모든 베트남인을 무기력 속으로 몰아넣었다. 메콩델타 지역의 한 80대 노파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난 항미 전쟁 때 아들 넷을 다 잃었어요. 둘은 남 베트남군으로 강제 징집되었고 다른 둘은 징집을 피해 베트콩 진영에서 싸웠어요.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내게 남은 건 코코넛 열매밖에 없었소. 그런데도 내 코코넛을 사러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요.”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실수’를 시인했다. 하지만 그 무렵 50만명이 넘는 베트남 사람들이 보트 피플이 되어 조국을 떠난 뒤였다. 하이 씨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1989년 배급제가 폐지되기 직전 베트남을 홀로 빠져 나갔다. 나머지 가족도 1990년대 세 차례에 걸쳐 모두 미국으로 탈출했다. 하이 씨는 10여 년간 미국에서 공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그러다가 2년 전 다시 호찌민 시로 돌아왔다. 현재 그는 작가로서 자신의 뿌리를 캐는 작업에 매달리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호찌민 시는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땅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책을 두고 호찌민 시의 한 유력 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1975년의 종전은 북부에 의한 남부의 ‘민족적’ 해방이었다. 하지만 1986년의 개혁은 남부에 의한 북부의 ‘경제적’ 해방이었다.”

사이공 토박이인 쯔엉 호 씨(30세)는 그러한 상황에서 성장했다. 1975년 해방둥이인 그에게는 전쟁의 끔찍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의 유년 시절에는 구두닦이를 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클로 운전수였다. 쯔엉 씨와 그의 형은 교실이 부족한 2부제 학교를 다녔다. 그는 오전반 수업을 마치면 오후반으로 가는 형에게서 구두통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구두를 신은 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그의 소원은 밥 한 그릇을 통째로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은 1994년 미국의 경제 제재가 걷히면서 찾아왔다. 

 
요즘 쯔엉 씨는 호찌민 시에서 가장 번잡한 팜응오라오 거리에서 일한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배낭족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개혁 개방의 눈에 띄는 성과물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는 레스토랑의 웨이터와 호텔의 벨보이를 전전하다가 5년 전 관광 가이드로 이 거리에 정착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직후였다.

이제는 한 달에 1백50 달러 정도 수입을 올려 웬만한 정부 공무원보다 형편이 낫다. 따라서 그는 국영 기업에서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여행 가이드이면서도 수도인 하노이 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기회’의 도시인 호찌민 시에 안착한 것에 대만족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전체 1인당 국민소득은 아직 5백 달러를 밑돌고 있다. 하지만 호찌민 시의 경우는 약 1천5백 달러에 달한다. 하노이 시의 주변부 산업지대는 현재 국내총생산의 20%밖에 점하고 있지 않다. 그에 비해 호찌민 시와 메콩델타 지역은 60%를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젊은이들이 호찌민 시로 대거 몰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종전 이후 태어난 이 세대는 전체 인구 구성의 60%에 육박한다. 더구나 이 세대는 ‘공산주의는 선,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짓눌려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현재의 베트남 사회에 활력과 탄력성을 주고 있다.

한데 최근 쯔엉 씨는 자기 직업에 약간의 회의를 느끼고 있다. 직업상 그는 매일같이 관광객들과 전쟁박물관에 가야 한다. 갈 때마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오곤 한다. 어릴 적 그는 우연히 장롱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남 베트남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 날 그는 아버지에게 된통 야단을 맞았다. 그 이후로 쯔엉 씨는 아버지와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나눈 적이 없다.  

쯔엉 씨처럼 남부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대한 상이한 기억을 지닌 부모를 두고 있다. 호찌민 시에서 만난 젊은이 중 열에 다섯은 그러하다. 전쟁 당시 북부인들은 ‘남부 해방’이라는 성전에 일사불란하게 임했다. 반면에 남부인들은 어느 편에 섰느냐에 따라 종전 후 승리자 혹은 패배자가 되었다. 아직까지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 전쟁이 내전의 성격을 지녔음을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쯔엉 씨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깥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사는 세계가 베트남과 다르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베트남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할 수가 없다. 공산당과 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다당제에 대한 논의는 베트남에서 금기 사항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베트남은 종전 30주년을 맞는다. 베트남 정부는 세계 각국 인사들을 초청해 대규모 공식 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호찌민 시 한복판에서는 저녁마다 사람들이 가두 퍼레이드 예행 연습을 한다. 반면에 일반 시민은 ‘관제 행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의미를 돌이켜보기에는 당장 먹고살 일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부인들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애쓴다.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베트남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듯이.

공산당 지도부, 사회주의 계획경제 폐해 인정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지난 30년간 베트남 사회는 커다란 진전을 보여 왔다. 우선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전쟁의 고통을 국민과 함께 져 왔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폐해를 과감히 인정했다. 그 결과 북부의 정치 권력과 남부의 경제 권력이 공존하게 되었다. 적어도 서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간 셈이다.

이 점은 한쪽으로 흡수 통일된 동서독과 대별되는 점이다. 또한 경제적·정치적 정당성을 잃은 북한과 남한의 통일 과정에도 많은 시사를 던져 준다. 우리는 반 세기가 넘도록 남북한의 통일이 ‘연기’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베트남은 우리보다 형편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남북이 화해를 모색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정부가 해결해야 할 정치·경제·사회적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 첫 번째 과제가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지식 파워로 등장한 신세대를 국가 기간 산업의 동력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영 기업과 민영 기업의 임금 격차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가장 큰 관건이라고 베트남의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아울러 현재 베트남 사회는 사회 전반에서 민주적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분출하고 있다. 종전 30년, 통일 30년을 맞는 베트남 정부로서는 이런 목소리를 어떻게 수렴하느냐 하는 점도 큰 과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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