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엔총회 통한 ‘북핵 제재’ 노린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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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자회담 불참’ 대비책으로 검토…힐 차관보 순방은 ‘최종 조정’ 성격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북핵 문제 역시 그렇다. 북·미 양측의 대립이 막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1994년 1차 위기 때는 카터 대통령이라는 제3의 중재자가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우연이었다기보다는 북·미 대립 구조에 따른 필연의 성격이 강하다.

북·미가 대립하는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감이 깊게 깔려 있다. 실무 협상을 하면 할수록 꼬이기 마련이다. 결국 치킨 게임으로 승패를 가를 수밖에 없는데, 대개의 치킨게임이 그러하듯이 충돌 일보 직전에 이를 회피하려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충돌할 경우 서로 치명적인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반면에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안전을 보장하고 먹고살 길만 열어주면 핵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북의 일관된 얘기였다. 계산이 뻔히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한·중·일 3국 순방(4월23~28일)이 매우 중대한 고비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워싱턴에 파다하다. 6월이라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앞두고 안보리 회부 여부를 저울질하기 위한 여행이라는 것이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라이스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강온 양면의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과거 파월 국무장관 시절에는 외교를 중시하는 국무부와 군사적 억지를 주장하는 국방부가 사사건건 대립했으나 지금은 국무 국방의 상호 조율 하에 입체화한 체제가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라이스 휘하에서 이 실무 조정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바로 힐 차관보이다. 그의 이번 여행은 일단 중국에 북한을 설득할 권한과 기회를 다시 한번 부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이 복귀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비상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워싱턴 소식통은 “북한이 끝내 6자 회담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 협의체를 구성한다는 게 힐 차관보의 복안이다”라고 말했다. 6자 회담이 무산될 경우 이들 5개국이 모여 북한의 불참으로 인해 회담이 무산되었다는 것을 공동 성명 형식으로 밝히고, 이를 토대로 안보리에 회부하겠다는 것이다.

치킨 게임 중재할 ‘제2의 카터’는 없는가

방한 기간 그의 발언 속에서도 그런 복안을 읽을 수 있다. 6자 회담이 무산될 것에 대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거나 ‘5개국은 회담 재개를 원하는데 한 나라만 참여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라도 문제를 풀어야 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이 소식통은 “중국에 북한을 설득할 권한과 기회를 부여한 만큼, 만약 실패할 경우 중국도 5개국 성명에 불참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외교를 넘어선 대북 제재 프로그램을 전담한 것은 딕 체니와 럼스펠트 팀이다.최근 워싱턴에서는 오랜만에 기가 오른 럼스펠트 국방장관의 모습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4월25일자 뉴욕 타임스에 그 일단이 소개된 ‘대북 제재격리(quarantine) 구상’이 바로 요즘 이들이 골똘히 연구 중인 과제이다.

<시사저널>이 워싱턴의 취재망을 통해 입수한 바에 의하면 이들의 복안은 이렇다. 힐 차관보의 외교적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고 5개국 성명이 발표되면 이를 토대로 북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끌고 간다. 그러나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기껏해야 의장 성명을 발표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이것 가지고는 제재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안보리를 형식적으로 거치되 실질적으로는 유엔 총회에서 제재 결의를 끌어내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다. 유엔 총회 결의는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만큼 국제 사회가 그 필요성을 납득하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6자 회담에 참여하는 5개국 성명이 바로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대북 제재 방식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대량살상무기 확산저지 구상’(PSI)을 발동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해상과 공중에서 북한을 봉쇄하고 격리하겠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도 지적했지만 현재 체니와 럼스펠트 팀이 연구 중인 것이 바로 쿠바 모델이다. 1960년대 미사일 위기로 시작된 쿠바에 대한 봉쇄가 40여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에서 이는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 받는다.

북한 봉쇄 역시 관건은 한국과 중국에 달려 있다. 일단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참여시키려 할 것’이라는 것이 워싱턴의 관측이다. 최근 반기문 장관이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미래가 없다’ 또는 PSI에 대해 ‘원칙적 반대, 부분적 참여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실무적 차원에서 들여다보면 북·미 관계는 이미 치킨게임 양상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바라보면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초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상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북·미 양측은 중국을 가운데 끼워 ‘간접 대화’를 한 바 있다. 
강부상은 중국측에 6자 회담 복귀 조건으로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에 대한 사과, 대북 제재 해제 및 핵 동결 보상, 그리고 안전 보장 약속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특히 후자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그 중 하나만이라도  약속해주면 복귀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엇갈리는 얘기가 있다. 강부상의 방중을 전후해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 얘기가 매우 구체적으로 나왔던 것으로 볼 때 처음에는  이 정도면 미국이 수용할 것으로 보았다는 얘기도 있다. 반면에 너무 지나친 요구라며 강부상을 냉랭하게 대했다고 하기도 한다.

강부상이 돌아간 뒤 중국은 미국에 이 얘기를 전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단 폭정의 전초기지에 대해서는 라이스 국무장관이 북한을 주권 국가라고 했고, 북한이 일단 복귀하면 양자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성의를 보였으나, 회담도 열리기 전에 다른 요구 사항을 들어 줄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후진타오 주석의 4월 말 방북도 어정쩡하게 되었다. 

결국 먼저 보장을 해줘야 복귀하겠다는 북한과 먼저 복귀하고 나서 얘기하자는 미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측 모두 내부의 강경 세력들 때문에 더 양보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실무를 초월한 제3의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머뭇거리니 그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나와야 한다. 민주당 때에는 카터가 그 일을 했는데 공화당에는 카터만한 인물이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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