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4.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유인씨 <천자의 나라> 화제…<판관 포청천> ‘팬픽’이 ‘팩션’ 무협지로 진화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쓰고 암행에 나선 황제 인종은 길가에서 우연히 개봉부윤 포청천의 호위무사이자 천하제일검 ‘전조’를 만난다. 전조는 정치적으로 얽힌 살인 사건을 풀기 위해 국경 근처 북리 군왕부로 떠나는 길이다. 전조의 인물됨에 호기심이 발동한 황제는 그와 동행한다. 살인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역모 사건으로 변한다.  

<천자의 나라>(김유인 지음, 오두막 펴냄)는 독특한 소설이다. 무협지 같으면서, 북송(北宋) 시대의 사료를 치밀하게 고증해 쓴 역사 소설이고, 사실과 허구가 수시로 교직되는 일종의 ‘팩션’ 추리 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팬픽(fanfic)에서 출발했다.

4년 전 어느 날. 작가 김유인씨(37)는 우연히 텔레비전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팬 사이트에 접속했다. 중국 북송 시대 역사를 공부하던 참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팬들은 여전히 사이트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팬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이미 끝나버린 드라마가 아니라, 네티즌 스스로 경쟁하듯 올리는 팬픽이었다.

팬픽은 팬(fan)과 픽션(fiction)을 조합해 만든 용어. 만화·소설·영화를 가리지 않고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작품을 팬들이 자신의 뜻대로 비틀거나 다시 꾸며 쓴 것을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이미 문학성을 갖춘 무라카미 하루키 팬픽이 여러 종 출판될 정도로 대중화해 있다. 팬픽은 최근 옥스퍼드 사전 온라인판에 새 단어로 등재되었다. 독자의 힘이 큰 쌍방향 문화 시대에 가능해진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국내에서 출판된 것으로는 <권상우와 미스리의 연애 이야기> 정도가 일종의 팬픽으로 분류된다.

인터넷 연재물이지만 정통 글쓰기 고수

 
아무튼 팬픽이라는 생소한 장르에 작가 김씨의 마음이 동했다. <판관 포청천>은 청나라 때 협의 소설 <삼협오의>를 각색한 드라마였고, 소설의 배경인 북송 인종 시대와 그 시대의 영웅들은 여러 무협 소설에서 다양하게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김씨는 이런 영웅담 속에 자신이 중국사를 공부하며 숙제로 삼았던 천자와 백성 이야기를 녹였다. 이를 위해 <중국사> <십팔사략> <시경> <두보 시선> 등 그동안 읽은 사료를 총동원했다. 

<천자의 나라>는 인터넷에 연재되며 화제를 뿌렸다. 그녀의 팬들은 중학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다양했다. 그녀는 지난해 한 골수팬이 만들어 선물한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2년 간의 연재를 끝냈다. 원고지 2천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인터넷 연재였지만 김씨는 정통적인 글쓰기를 지향했다. 중국사에 생소한 독자를 위해 다양한 각주를 달았고, 약간의 이모티콘만 제거하고 출판했을 정도로 문장도 완벽했다. 김씨가 다룬 주제는 ‘바른 정치가 무엇이냐’는 것. ‘천자는 하늘의 아들, 곧 이 땅의 백성이다’라는 주인공의 대사 속에 그녀의 생각이 담겨 있다. “연재하면서 귀여니식 인터넷 글쓰기에 식상해 하는 젊은 네티즌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작가 김씨는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녔고, 고등학교 영어교사·잡지 기자·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한 적도 있다. 세간에 알려진 책도 몇 권 썼다.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유인은 필명. 그의 글을 우연히 읽은 철학자 윤구병씨가 책 출간을 권유하며 지어준 이름이다. 오두막은 윤씨가 고문으로 있는 보리출판사의 자회사다.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다”라는 것이 윤구병씨의 독후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