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고 맞아 죽고 목 매 죽고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4.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 최초 공개/징용 조선인 74명 사망한 ‘아시오 탄광의 비극’


 

 
일본에서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곳은 닛코(日光) 시(도치키 현 소재)이다. 그곳에서 약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가면 해발 2000m 안팎의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오지 마을이 나온다. 아시오죠(足尾町)다. 지금은 남녀노소 모두 합쳐 주민 수 3천명을 헤아리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아시오죠는 한때 인구 3만이 넘는(1916년), 일본에서도 제일 가는 광산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바로 이곳에 일본 최대의 구리 광산 아시오 동산(銅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에 처음 문을 열었고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이 구리 광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또 있다. 이 광산은 1973년, 4백년이라는 장구한 구리 채굴 역사와 그에 걸맞는 엄청난 규모(갱도 총연장 2백34km)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이 광산의 제련소 등이 내뿜는 아황산가스가 산하를 온통 오염시켜 최악의 환경 재앙을 빚었기 때문이다. 아시오죠에는 아직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민둥산이 즐비하다. 이 지역을 휘돌아 흐르는 와타라세 강 하류에는, 수질 오염을 견디다 못해 주민 전체가 보따리를 싸는 바람에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 아시오 동산은 무차별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가를 일깨우는 대표적인 체험 학습 현장으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특히 일본의 저명한 환경운동가 다나카 쇼죠가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아시오 지역은 생태계 복원 시범 지역으로 일본에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아시오 광산은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되고 ‘복원’되어야 할 곳이다. 일제 말 발동한 국민 징용령에 따라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갖은 차별과 학대를 당하며 노예처럼 살다가 삶을 마친 수많은 한국인의 원혼이 서린 곳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 대한 강제 징용(일본에서는 ‘강제 연행’)은 종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제가 저지른 주요 전쟁 범죄의 하나로, 그 피해자 수가 1백30만명을 웃돌아 현재까지도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할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다.

 
 
아시오 지역의 역사를 잘 아는 현지 주민의 증언과 오래 전 재일 동포의 손으로 작성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이 아시오 광산에 강제 징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다. 지금까지 파악된 징용자 수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2천4백여 명이다.
 당시 한국인을 끌고 간 주체는 아시오 광산의 소유주인 후루가와(古河) 기업이었다. 중·일전쟁이 치열해지고 일본 제국에 국민 징용령이 내려지면서 강제 징용은 합법화했다. 회사측은 노무 관계자를 수시로 한국에 파견해 계획적으로 한국인을 연행해 광산에 배치했다.

 회사측의 ‘인간 사냥’은 한반도 남부, 그 중에서도 주로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후루가와측은 이들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 연락선’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1951년부터 약 15년간 아시오 광산에서 일한 바 있는 사이토 아쓰시 씨(齊藤惇·77)는 “‘후루가와 직원이 처음에는 서울로 갔으나 징용자를 제대로 모으지 못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연행했다’는 이야기를 (역시 광산에서 일했던) 선친으로부터 들었다”라고 말했다.

 아시오에 끌려간 한국인은 코타키 등 아시오 지역에서도 가장 생활 여건이 열악한 곳에 흩어져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아시오 지역 곳곳에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이른바 연립식 ‘사택’은 한결같이 깊은 산속에서도 그늘이 깊이 드는 후미진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아시오 광산은 대부분 해발 2000m를 오르내리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 있다. 설악산 기온이 가을에 접어들기 무섭게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상기해보면, 아시오 지역의 겨울 추위가 얼마나 혹독했을지를 쉽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병 걸린 노동자 묶어놓고 두들겨 패

 
 

생활 환경만 열악했던 것이 아니다. 아시오의 한국인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았다. 1960년대 이전 아시오 지역을 실제 답사하면서 한국인 강제 연행 실태를 조사한 박경식씨(1998년 작고)의 서술에 따르면, 후루가와의 노무 담당자들은 ‘다리를 다쳐 갱내에 들어가지 못하면, 다리를 감전시키기도 하고’ ‘병에 걸려 일할 수 없는 노동자를 전신주에 묶어놓고 때리기도’ 했다. ‘식량이 줄어들면 썩은 감자로 연명해야 했고’ ‘이 때문에 영양 실조에 걸려 무처럼 다리가 뻣뻣해진 시체가 수레에 실려 나가기도’ 했다. 일제의 가혹 행위는 말 그대로 처참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시오 탄광 지역에 끌려간 한국인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으며 광산 일에 종사했는가는 아시오 지역의 센렌지(專念寺)에 남아 있는 기록과, 이 절의 후지모토 마사즈미 주지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센렌지는 아시오 광산 지역 입구에 자리 잡은 절로 코타키의 센도쿠지(專德寺), 아카쿠라산의 류조지(龍藏寺)와 더불어, 일제 말 후루가와 기업의 의뢰로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은 한국인 징용자와 그 가족의 유골을 거두어 위령제를 지내주던 곳이다. 이 중 센도쿠지는 불에 타 실상을 전해줄 기록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센렌지에는 일부 희생자의 사망 연월일을 기록한 ‘과거장(過去帳)’ 외에, 재일 동포 고 손대용씨(사망 연월일 미상)가 1999년 작성한 <아시오 동산 지역 희생자 명부(‘희생자 명부’)>와 <도치키 현 한국인 강제 연행 노동 진상 추적 조사 현황> 등 당시 참상을 간접으로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인 사망자 수는 모두 74명이다. 절반 가까이는 골절상·추락사·두개골 골절 등 작업 중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강제 징용된 한국인 대부분이 갱내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 부서에 배치되어 일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45년 7월27일(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하기 바로 직전이다) 안타깝게 숨진 정범준씨(경북 경산 출신으로 1944년 5월20일 광산에 배치됨·사망 당시 32세)의 사인은 ‘두개골 복합 골절’이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42년 아시오에 끌려간 김별판씨(당시 24세)는 약 4개월 뒤 아시오 광산 3대 갱 중 하나인 쓰토(通洞) 갱 안에서 일하다가 24살의 나이로 추락사했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김종선씨도 1943년 아시오로 끌려가 6개월 뒤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

 
 
아시오 광산 한국인 희생자들이 모두 작업 중 숨진 것은 아니다. 사인 난에 ‘유아 각기’로 표시된 김 아무개는 1938년 죽을 당시, 한 살배기 아기였다. 역시 최순자라는 이름의 돌배기여자 아기는 소화불량증으로 죽었다. 이밖에 어른 가운데에도 폐렴이나 뇌막염을 앓다가 죽은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강제 징용자 대부분이 최소한의 영양 공급이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가 죽었음을, 이같은 기록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일 사학자 박경식씨가 쓴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인 징용자는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거나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한국인 징용자들을 감시·감독하는 ‘숙사장’의 가혹 행위를 참지 못해 아시오 광산 지역에 이웃한 코신산(庚申山)이나 키류(桐生) 방면으로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힌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서는 고통받고, 죽어서는 장례도 못치러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의 아시오 광산 탈출 흔적은 세렌지에 보관된 <희생자 명부>에도 남아 있다. 바로 심윤성씨 경우로, 그는 1942년 2월6일(추정) 아시오 지역 경계에서 동사했다. 사인 난에는 ‘도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전 전 아시오 광산에서 일하다가 용케 탈출에 성공해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인물도 있다고 센렌지 주지는 말한다.

 
 
시신은 형식적인 조사만 끝내고 서둘러 화장했으며, 한국에 있는 연고자나 유족에게 연락하는 등 사후 절차도 매우 소홀했다. 한국인 사망자는 살아서는 고통받고, 죽어서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상당수 사망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센렌지의 후지모토 마사스미 주지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당시 후루가와측은 ‘역병이 돌 것을 우려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서둘러 사망자들을 화장했으며, 선친이 절의 주지로 있을 때에는 물론 자신이 절의 운영을 맡은 이후에도 ‘유골 수습’ 등을 이유로 한국인 연고자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손대용씨가 작성한 <희생자 명부>의 일부 사망자 칸에는 ‘퇴직 시 대우 보험 연금’ 난에, 사망자의 유족에게 돌아갈 보험금 액수가 적게는 몇백 엔에서부터 많게는 몇천 엔까지 적혀 있다. 하지만 이 돈이 사망자 유족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센렌지측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연고자가 나타난 바가 없다는 주지의 증언 등 관련 정황을 볼 때, 이 돈들은 아예 지급되지 않거나 중간에 다른 사람이 가로챘을 확률이 매우 높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광복 이후 60년이 흐르기까지 남북한의 무관심 속에 아시오 광산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 수난사는, 그런 사실이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기나긴 세월의 늪에 방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아시오 광산에는 한국인 징용자말고도 중국 포로들도 끌려와 한국인과 거의 같은 처지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희생되었다. 그런데 중국인 희생자들의 경우는 1973년 이들(1백3명)을 위한 위령비(중국인 순난 열사 위령비)가 세워져 뒤늦게 넋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아시오죠 의원으로서 지역 내력에 밝은 후지이 도요(藤井 豊)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1973년 중·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양국 우호 조성 차원에서 추진된 일로, 일본측에서는 주로 일본 공산당이 나서서 사업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시오 광산의 한국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은 전후에도 내내 버림받았다. 일제가 한국에서 강제 징용자를 끌고 갈 때 내세운 구실은 일본인과 똑같은 ‘천황 폐하의 신민(臣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는 ‘반도인’으로 구별되었고, 전쟁 뒤에는 ‘일본 국민’에서 제외되었다. 아시오 광산 수난의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 넋을 달래는 일이 똑같은 희생자이자 피해자라고 할 재일 동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조차 못 세워

 
1980년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시오 광산 한국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조총련 대학생들이 해마다 수난의 현장을 돌아보며 높이 2m 안팎의 비목들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희생자들과 인연이 있는 센렌지 측도 위령비 대신 세운 목제 현판(아시오 동산 조선인 강제 연행 희생자 명)을 세웠다. 센렌지에 그나마 사망자들의 명단 일부 등 진상 규명을 위한 기초 자료가 남게 된 것은 이들의 노력 덕분이다.

 토치키 현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에 참여했던 재일 동포 최조웅씨는 “사업은 1985년 시작했다. 당시는 재일 동포의 주축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동포 1세의 고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진상 조사 사업은 1998년 자료집이 발간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그 뒤 사업은 번번히 좌절을 맞보았다. 위령비 건립도 그 중 하나다. 최근 몇 년간 세렌지와 도치키 현의 일부 뜻있는 일본인과 재일 동포들이 힘을 모아 위령비 건립 작업을 추진해왔지만, 일본 우익의 ‘빗나간’ 애국심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위령비 건립 터를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선정하려 하자, 일본 우익이 나서서 중심 인사들에게 전화 협박을 하는 등 ‘방해 공작’을 일삼았다.

  오랫동안 잊혔던 아시오 광산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 추모 사업은 최근 들어 전기를 맞았다. 지난해 우연치 않게 이곳을 방문했던 제천서울병원 김정식 원장(00쪽 상자 기사)이 좀더 대대적인 진상 조사와 위령비 건립 사업을 모색하는 등 한국측 인사들이 아시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원장은 위령 비목 몇 개만 초라하게 서 있는 수난의 현장을 보고 안타까웠다. 이미 10여년 전 일본 작가 하하기기 호우세이가 한국인 강제 징용자를 주제로 쓴 소설 <정염해협>을 읽어, 강제 징용자들의 피맺힌 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그였다. 재일 동포 학생들이 세운 초라한 위령 비목은 그에게 번듯한 위령비를 세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는 한국보다 형편이 나을 것도 없는 중국인들이 아시오 광산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이미 위령비를 세웠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인들 사이에 추진력이 남다르기로 소문난 김원장은 일본에서 귀국하는 즉시 위령비 건립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사업 추진을 위해 스스로 ‘3대 원칙’도 세웠다. 첫째, 이 사업으로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키지 않는다. 둘째,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셋째, 사업을 통해 한·일 교류와 친선을 도모한다. 한마디로, 일본과의 우호는 해치지 않으면서 일본이 한국인을 상대로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겠다는 취지였다.

   이후 김원장은 바빠졌다. 병원 일을 보는 틈틈이 일본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물색해 자료 수집을 부탁하고, 가급적 많은 사람의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아시오 이야기를 제대로 알릴 유명 작가와 학자 등 지식인 규합에 나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다. 김원장은 충북 제천에 2백7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 재력이 튼튼한 편이다.

  김원장은 평소 ‘일본을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소신으로 일본의 역사는 물론 사회 모든 영역을 깊이 파고드는 등 철저한 ‘지일파’를 지향해 왔다. 김원장은 아시오 광산 위령비 건립에 관계하는 외에도, ‘과학 대국’으로서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일본 과학의 산실 ‘이화학연구소’를 다룬 책의 번역·출판도 서두르고 있다. ‘한국의 우수 두뇌들이 이공계를 지망하지 않는 매우 잘못된 경향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는 것이, 김원장이 출판사를 직접 찾아다니며 이 책을 출간하려는 목적이다. 김원장은 이 책의 한국 출간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4월 말 이화학연구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