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개국공신’ 반란자로 돌아서나
  • 류재화 통신원(스트라스부르) ()
  • 승인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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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U 헌법 찬반 국민투표 앞두고 반대 여론 급등

 
 프랑스가 유럽의 앞길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될까. 오는 5월29일 유럽연합(EU) 헌법 비준 찬반 국민 투표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반대가 비등하자,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네 나라만이 찬성안을 확정한 상태다. 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연합 25개 회원국이 국민투표 혹은 의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의 선택이 다른 유럽 나라에 미칠 영향은 불을 보듯 뻔하다. 6월1일 국민투표를 앞둔 네덜란드도 30%에 불과하던 반대 여론이 며칠 사이 60%까지 치솟았다. 브뤼셀 유럽연합 본부는 프랑스의 부결 사태에 대비해 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최악의 경우 헌법에 준하는 협약을 만들어 국민투표 대신 대표들 간의 합의만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안이 나올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 바르니에는 “B플랜은 나올 수 없다”라고 말했으며, 네덜란드 외무장관 베르나르 보도 “유럽연합 헌법을 대체하는 다른 안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결과에 100% 승복해야 한다”라고 못박았다. 핀란드·오스트리아·포르투갈 대통령들은 일제히 제발 프랑스가 ‘예스’로 돌아서기를 간곡히 바라고 나섰다. 찬성안에 지지하는 전 유럽 좌파 청년단들은 4월25일 ‘예스를 위한 행진’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프랑스 전국 12개 도시를 순회하는 ‘캐러밴’을 조직해 릴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유럽연합 헌법 초안 작성자이자 유럽 통합 건설의 주축국인 프랑스가 이제 와서 유럽에 등을 돌리려는 이유는 프랑스 외부에 있지 않다. 프랑스는 유럽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라크-라파랭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국민투표를 뜻하는 ‘레퍼랜덤’을 ‘라파랭덤’이라고 부른다. 언론은 라파랭 총리를 ‘꽁’(머저리)이라고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유럽연합 헌법에 대한 찬성안이 통과될 경우, 2007년 대선에서 시라크가 3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사람이 많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런 프랑스인들의 태도를 두고 ‘프랑스는 자신의 내부 문제를 유럽연합에 떠넘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부에 화난 국민들, 유럽연합에 분풀이


  유럽연합에 대한 불신과 회의는 최근 악화하고 있는 경제 상황 탓이다. 투표를 한 달도 남겨놓고 있지 않지만, 프랑스인 상당수는 448개 조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장황한 유럽연합 헌법안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어도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료적 용어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헌법이 공공 부문, 보호 무역 정책, 노조주의, 노동권 보장 등 유럽 사회 경제 모델인 ‘사회주의-민주주의’ 원칙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반대 여론을 주동하고 있는 노동당 등 극좌파는 유럽연합 헌법이 ‘너무 리버럴하며’ 영미식 자본주의와 진배없다고 본다. 학교·병원·우체국 등 모든 공기업과 공기관이 민영화 순서를 밟게 되며, 의료보험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도 악화하는 등 유럽의 사회주의적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4월14일 시라크 대통령은 반대표를 잠재우기 위해 텔레비전 토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대통령은 ‘제발 두려워하지 말라’ ‘유럽연합 헌법은 앵글로색슨 족의 울트라리버럴리즘에 맞서기 위한 성벽’이라고 강조했다. 방송 다음날 이 ‘성벽’설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반대 여론이 56%까지 상승했다. 노동자·실업자·농민·반 세계화주의자 등 반대 진영들은 성벽이 뚫린 지 이미 오래이며, 유렵연합은 거센 신자유주의 물결의 대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전령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찬성안이 우세했다. 유럽연합의 행보에 딴죽을 걸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근 자극적인 사건 몇 가지가 불거졌다. 데로칼리자시옹(공장의 해외 이전)이 걷잡을 수 없는 대세가 되면서, 프랑스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값싼 노동 시장을 찾아 중국이나 인도로 떠났다. 일명 ‘볼크슈타인’ 지침안에 따라 폴란드 계절 이주 노동자들이 대거 프랑스 업체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등학생들은 바칼로레아 교육개혁안에 반대해 연일 수업 거부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대학마저 자유 시장 경제 논리에 종속되고 있다며, 개혁안을 철회하라고 외쳤다.

각 정당, 대선 전초전으로 여겨 여론몰이 박차


또한 중국산 섬유류 쿼터제가 폐지된 올해 들어 값싼 중국 섬유 의류품이 프랑스 시장에도 속속 상륙해 위기감을 더 고조시켰다. 4월25일 프랑스 산업부 장관은 유럽위원회에 긴급 세이프 가드 발동을 요구하고, 유럽위원회는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중국 당국도 이에 강력하게 맞서고 있어, 당분간 유럽연합과 중국 사이에 섬유 전쟁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 가난한 동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 합류와 이민 물결도 유럽 통합 문제의 지난한 숙제다.

 
  ‘위(oui·예스)'냐 ’농(non·노)'이냐로 프랑스가 이분되어 공방전을 벌이고 있지만, 그 이유와 맥락은 제각각이다. 사회당 내 찬성파는 유럽연합 논쟁이 처음부터 잘못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반대 진영들의 불만과 주장은 모두 합당하지만, 프랑스가 ‘농’을 던져 얻을 수확은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화는 흘러가는 물결이다. 유럽 헌법안 문제가 아니어도 프랑스는 미국·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시장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이미 ‘위’를 표방한 중도 좌파 언론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프랑스병 때문에 프랑스가 유럽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라며,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는 노동당이나 농민운동연합 등 극좌파·반세계화주의자들의 주장을 비이성적이고 무책임한 감정적 선전 선동이라고 비난한다. 장-마리 르펜을 위시한 민족주의 극우파 역시 결사적으로 ‘농’을 외치고 있는데,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프랑스가 유럽 안에서 주도권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대파 확산이 현 시라크 정부에 대한 불만임을 잘 알고 있는 사회당은 5월29일 국민투표일을 2007년 대선의 전초전으로 보고 있다. 지난 대선 패배 이후 정계에서 퇴진한 리오넬 조스팽의 복귀도 예상된다. 조스팽은 이미 몇 달 전 침묵을 깨고,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위’를 표방함으로써 유럽 헌법 논쟁에 불을 붙인 바 있다. 지난 4월14일 시라크 대통령의 텔레비전 토론은 실패한 정치쇼로 끝났지만, 사회당 인사들의 ‘구원’ 요청으로 긴급 출두한 조스팽의 정치쇼가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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