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교실 덮친 ‘내신 대란’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5.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신 직격탄’을 맞은 고교 1학년 학생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공공의 적’이 된 내신등급제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중간 고사가 끝난 오후에 답안지가 나왔어요. 채점을 하는데 친구들이 하나 둘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ㅅ여자고등학교 1학년 이 아무개양(16)은 지난 4월29일 시작된 중간 고사 기간이 악몽이었다.

교과서에서는 보지도 못한 지문이 출제되었고 시험장엔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채점할 때 틀린 문제를 세는 것보다 맞춘 문제를 세는 편이 빨랐다. 이양이 속한 학급의 영어 과목 평균은 100점 만점에 30~40점이었다.

이양과 같은 고등학교 1학년생들(주로 1989년 출생자)은 2008년부터 새로 시행되는 대학 입시 제도가 처음 적용되는 세대다. 새 제도에서는 상대평가에 의한 내신등급제가 시행되고 대학 입시에 내신 반영 비율이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교사들은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고 있다. 2·3학년 중간고사도 덩달아 어려워졌다(상자 기사 참조). 중간 고사 이틀째인 4월30일에는 이양 학교의 2학년 선배가 투신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친구들 입에서 자살하자는 말이 너무 쉽게 나와요. 농담 같지 않게 들려요.” 이양의 친구인 인근 고등학교 1학년 홍 아무개양의 말이다. “수업 내용을 필기한 노트를 도둑맞는 일이 있어요. 선생님도 노트 관리 잘 하라고 해요. 특정 부분만 찢어가는 경우도 있어요.” 

  대체로 각 고등학교의 중간 고사는 5월5일 어린이날을 전후해 끝났다. 2008학년도 입시안 발표 이후 처음 중간 고사를 치른 고등학교 1학년들은 충격이 컸다. 충격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일부 ‘고딩 1학년‘은 내신등급제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5월7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중간 고사 후폭풍’ 걱정도 태산

 
벌써부터 ’중간고사 후폭풍‘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앞으로 채점 결과가 통보되면 그에 반발해 이의를 제기하는 소동이 들불처럼 번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다음 카페(cafe.daum.net/freeHS)에 모임을 만들었는데, 6일 만에 회원 수가 1만2천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학생을 경쟁시키고 서열화하고 학생을 기계로 만드는 어른들의 의식구조 자체가 잘못되었다’(운영진)라며 기성 세대를 비판하고 있다.

서울 ㄷ고 김다은양(1학년)은 촛불 시위 직전 ‘우리 모두 학생들을 괴롭히는 등급제를 반대합시다! 이거 20명한테 돌려, 아님 9등급 받는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바야흐로 내신등급제가 ‘공공의 적’이 되어가는 양상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학부모·언론까지 ‘내신등급제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서울 동덕여고 전상용 연구부장은 “원래 시험을 보고 성적을 내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성취감을 고취하는 데 있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위해 내신이 쓰이다 보니 변별력을 위해 문제를 어렵게 내는 경향이 생긴다. 이것은 교육 철학과 맞지 않다”라고 말했다.

부천에서 고교 교사를 하는 ㄱ씨는 “내신등급제는 차상위 학생들이 가장 손해 보는 제도다. 최상위권 학생은 변별력이 생겨 득을 본다. 차상위 학생들은 과거 같으면 ‘열심히 하면 나도 1·2등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능성이 원천 봉쇄되었다”라고 말했다.

내신등급제가 체제 순응적인 학생들을 기른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 ㅅ고교 교사는 “자기는 3번이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교사가 5번이라고 하면 군말 없이 자기 생각을 고친다. 그래야 우등생이 되니까”라며 가뜩이나 부족한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이 더 퇴화할 것을 염려했다.

당초 내신등급제를 도입하는 이유였던 사교육 억제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 현장의 중론이다. 서울 ㅂ고 1년 백 아무개군은 “영어 선생님이 ‘학원 갈 필요 없다.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만 공부하면 성적 나온다’라고 하셨는데 막상 중간 고사를 보니 수업 시간에 못 본  지문이 여러 개 나와 배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덕분에 신난 것이 사교육 시장이다. 지난해 교육방송 수능 강좌 개시 이후 잠시 주춤했던 사교육 시장은 이번 내신등급제 파동을 계기로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관련 기사 참조).

그러나 일각에서는 내신등급제 죽이기 열풍이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지적한다. 한 온라인 학원 담당자는 “언론이 한 번 들썩일 때마다 학부모들의 문의 전화가 줄을 잇는다. 지난 서울대 입시 요강 발표 때도 냉정하게 보도했으면 고1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신 등급제에 관한 정보들이 정확치 않아 고1들이 더 격앙된 측면도 있었다. 일례로 입시에서 내신이 차지하는 비율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직 대학에서 2008학년도 입시 요강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체능을 포함한 모든 과목 내신이 다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신입생을 100% 내신으로만 선발하는 대학은 드물다. 수행평가·수학능력시험의 비중이 여전히 높고 내신의 경우 열두 번 치르는 시험 성적이 합산되기 때문에 중간 고사 하나가 입시에 미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학생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흥미있는 것은 그간 고교 평준화 폐지를 일관되게 주장해 온 보수 언론들이 이번 내신 등급제 파동을 특히 비중있게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청소년 전문 뉴스 사이트인 ‘인터넷 뉴스 바이러스’는 5월5일 머리 기사에서 조선·중앙·동아 일보 등 보수 언론이 학생들의 내신 반대 외침을 ‘입맛대로‘ 오용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학생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본고사 부활을 교묘히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뉴스바이러스는 본고사는 오히려 학생들의 입시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것이며 학생들의 요구와는 정반대의 결론이라고 비판했다.

5월7일 광화문 집회를 주최한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의 입장도 본고사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 이 단체 이금미 사무국장은 “5월7일 행사는 원래 집회가 아니라 자살한 학생들을 위한 추모제였다. 물론 상대 평가가 도입되면서 옆자리 친구와 경쟁하게 된 것은 문제다. 하지만 지금 학생들은 내신등급제라는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입시 고통을 강요하는 현실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본고사를 부활시키려는 세력과는 단호히 선을 긋겠다”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 본고사 부활 은근히 유도”

김진표 교육부장관은 5월6일 ‘전국 고1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학생부 성적은 한두 번의 시험으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학생은 ‘티끌 모아 태산’이고, 불성실한 학생은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반영됩니다’라며 학생들의 이해를 촉구했다. 내신등급제를 도입한 애초 의도를 되새겨 보자는 말이다. 1년 전에는 한 번의 수능 시험으로 대학 입시를 결정하는 ’수능 로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내신등급제 실시 이후 ‘교실 붕괴’라는 오명을 썼던 공교육 현장이 정상화하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서울 ㅅ고교의 한 교사는 “수업 분위기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다. 한눈 파는 학생도 ‘이거 시험에 나온다’고 하면 금세 집중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교사가 실력이 아니라 성적으로 학생을 장악하는 것은 진정한 공교육 정상화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더 근본적인 한계는, 현행 대학 서열 구조가 온존하는 한 어떤 입시 제도를 갖다놔도 경쟁은 과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재 내신등급제 반대 모임(다음카페 : freeHS) 게시판에는 수백 개의 글이 올라오며 뜨겁지만, 정작 ’바라는 교육제도‘라는 대안 게시판은 겨우 2개의 글만 올라와 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소위 명문대 출신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제도도 대안으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