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집회에 '얼굴'이 없는 까닭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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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판 기사] 광화문 고1 ‘입시 경쟁 희생자 추모제’ 평화롭게 끝나... 교육청 징계 엄포 효과

 
“니들 여기 왜 왔어? 뭐 하는 거냐?” 지난 5월7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정문 앞에서 일산 P고등학교에서 온 교감과 학생부장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저녁 6시 반 쯤 버거킹 맞은편에서 이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1학년 남아무개양 등 일행 4명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시위하러 온 거 아니고요. 교보문고에 책 사러 왔어요”라고 둘러댔다. 이날은 교보문고 앞마당에서 ‘입시 경쟁 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가 열리기로 예고된 날이었다. 최근 잇따른 자살로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원래는 최근 자살한 학생들 추모하는 모임으로 준비돼

교감은 교보문고에 갈 필요 없다며 빨리 귀가하라고 독촉했다. 학생들은 집으로 가는 척 하면서 되돌아와 추모 집회장 주변을 서성거렸다. 7시30분 경 기자와 만난 남 양 일행은 “왜 선생님들이 참가를 막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가만히 촛불만 켜고 앉아 있는 건데”라며 섭섭해 했다. 이들은 끝내 집회장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5월7일 저녁 ‘4·19 혁명 이후 초유의 고등학생 시위’라며 관심을 모았던 광화문 집회가 열렸다.  원래는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이라는 단체가 최근 잇따른 자살로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촛불추모제였으나, 내신등급제 반대 여론과 겹치면서 중간고사를 마친 고등학생들이 모여 ‘한을 푸는’ 자리로 비화했다.

올해부터 내신등급제와 상대평가제가 실시되면서 고등학교 중간고사가 전례 없이 어려워졌고 시험 도중 자살하는 학생이 속출했다. 학생들은 옆자리 친구를 경쟁자로 만드는 내신등급제를 폐지하라며 집단 행동을 할 움직임을 보였다.

 
5월2일 께부터 ‘7일에 광화문에 모여 내신등급제 반대 시위를 하자‘라는 문자메시지가 전국의 고등학교 1학년들에게 뿌려졌다. 5월7일은 1학기 중간고사 이후 첫 주말이다. 어른들은 긴장했다. 이날 광화문 주변에는 전투경찰 수송 차량 50여대가 보였다. 동원된 경찰만 6천 명이었다.

하지만 집회장에 들어가 앉은 고등학생은 7백여 명 뿐이었다. 수 만 명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친구 한 명과 함께 행사에 참가한 고1 여학생은 “이게 뭐냐, 제대로 뭔가 보여줘야 하는데 우리학교 한 학년 숫자보다 적게 왔다”라며 실망했다.
고등학생들이 광화문까지 오면서 겪었을 심적 부담을 고려하면 처음부터 대규모 집회는 무리였다. 이날 ‘자봉단’(자원봉사단)으로 행사 진행을 도운 서울공업고등학교 김아무개군(3학년)은 “여기저기서 우리 행사 방해한 걸 생각하면 이 숫자도 많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문자돌리기는 많이 참여하지만, 행사는 귀찮다고 오지 않아

여기저기서 방해를 했다는 건 무엇일까? 행사장 주변을 서성거리던 일산 ㅈ고등학교 박아무개 양은  “집회장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갈등때리는(갈등하는) 중이에요. 학교에서 집회 참가로 뉴스에 나오면 학교 명예 훼손으로 전학 보낸다고 겁 줬거든요”라고 말했다.

 
박양과 함께 온 ㅂ고등학교 이아무개양(1학년)은 “교감선생님이 방송으로 시위하는 학생은 징계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종례시간에 담임 선생님도 말리시고...”라고 말했다.

서울시 교육청의 경우 집회가 있기 전 ‘각 학교 학생부장·1학년 부장, 교육청 장학사 7백56명을 현장에 보내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추모제 시작 예정 시각이었던 저녁 6시에 참가 학생은 겨우 2백여 명이었고 그 보다 많은 양복 중년들이 교보문고 앞을 지켰다.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이 어른들은 양복 상의 왼쪽에 동그란 초록색 스티커를 붙이고 있어서 시민과 구별되었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이 고등학교 교사가 맞다면서 “윗 선(교육청)에서 초록색 비표를 붙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들 뒷편에서 “우리 애들은 없는 같네요”라며 안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최측은 주변에서 망설이는 학생들을 끌어오기 위해 애썼다. 이날 주최측 진행 요원들은 주로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과 운동 단체 '다함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6시10분경 광화문 지하철 역 개찰구 앞에서 교복 입은 여고생 4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경찰이 위에 깔려 있어서 올라가기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한 고등학생 자원봉사자가 설득에 나섰으나 4명은 결국 발길을 돌렸다. 이 남학생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는 “선생님들에게 적발되어 행사에 참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 전철 역사까지 내려와서 안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추모제 장소 안으로 들어와 앉은 학생들도 전단지로 얼굴을 가리며 신원 노출을 꺼렸다. 6시40분 경부터 시작해 8시20분까지 계속된 추모제 내내 학생들과 사진 기자들 사이에 ‘얼굴 감추기 전쟁’이 벌어졌다. 카메라플래시가 터지면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등급으로 나눠지는 돼지가 아니다"

사진 촬영을 제지하는 주최측과 기자들 사이에 실랑이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참가자 수백 명이 “사진 찍지 마세요” “우리를 보호해 주세요”라는 구호를 합창해 기자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몇 몇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학생들은 끝내 자신들의 실명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날 집회는 결국 사람은 있는데 얼굴은 없는 집회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날 추모제 참가자가 적었던 이유가 오로지 학교 당국의 징계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행사에 참가한 한 남학생(고1)은 “친구들은 대부분 귀찮다는 이유로 안 왔다”고 말했다. 문자메시지 돌리기는 재미삼아 유행처럼 번질 수 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교육청과 학교의 징계 가능성 엄포가 나름의 효과를 발휘한 게 사실이다. 이날 행사장 근처에 있던 김영삼 전교조 학생청소년위원장은 “학생들의 순수한 자기 표현이 타의에 의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등 12개 인권 단체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학생들의 집단행동 불허 방침을 철회하고 행사 참여를 이유로 학생을 징계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추모제가 끝나기 직전 주최측 사회자는 “행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학생은 신고해 달라”라고 말했다. 

행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자리를 청소했다. 집회 뒷정리를 하던 신지현(ㅇ여고 1학년)양은 “자살한 언니오빠들의 엄마가 무대 위에 나오셔서 우리보고 절대 죽음을 택하지 말라고 할 때 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 혹은 입시 경쟁 반대 집회에서 울려 퍼진 구호는 ‘청소년이 주인이다’ ‘우리가 학교를 바꾸자’ ‘우리는 등급으로 나눠지는 돼지가 아니다’였다. 귀가하던 학생들은 대부분 이런 집회가 다시 열린다면 또 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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