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이어트’를 권유함
  • 고종석(소설가·언론인) ()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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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최근의 고교생 촛불집회는 입시 전쟁의 전사 노릇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좌절감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 가운데 1학년생이 가장 많았던 것은 그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상대평가 방식의 내신등급제 때문이었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가 ‘대학 서열 폐지’를 주장했던 것을 보면 우리 교육 문제의 핵심이 아이들의 눈에도 또렷했던 모양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지적하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병폐는 고정된 대학 서열이 물질적 상징적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와 너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0대 말 어느 시기에 특정한 방식으로 측정된 지적 성취도에 따라 어느 대학에 입학했느냐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사회에서,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느냐는 고등학교 교실 풍경을 바꾸는 데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내신의 비중을 높이든 낮추든, 내신 평가가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수능 비중을 높이든 본고사를 부활하든, 현재의 엄격하고 고정된 대학 서열과 몇몇 대학 출신자들의 물질적 상징적 자본 과점이 이어지는 한 입시 전쟁의 강도는 줄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 정상화의 핵심은 특정 대학 졸업장과 그 이후 인생 경로 사이의 연결을 다소라도 약화하는 데 있다.

대학 서열 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거 하나는 학문에서든 어디서든 진보는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이다. 옳다. 그런데 지금처럼 고정된 대학 서열은 바로 그 경쟁의 공정성에도 장애물이다. 한국처럼 인맥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이른바 상위권 대학 졸업자와 그 밖의 대학 졸업자 사이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심지어 상위권 대학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의 추세를 보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느냐 고려대 법대에 들어가느냐를 결정짓는 성적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그 성적 차이는 지적 성취의 또렷한 차이라기보다 수능시험 당일 수험생의 컨디션 차이나, 내신을 평가하는 교사의 기분 차이에 더 의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대 법대에 들어간 학생은 졸업 뒤의 경쟁에서, 그 곳이 법조계든 일반 사회든, 서울대 법대 졸업생에 비해 크게 불리할 것이다. 두 대학 졸업생들이 한국 사회에 구축해놓은 망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위 세 대학 졸업생이 한 해 1만5천명이니…

대학 서열 완화가 인간의 보편적 인정 욕구와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는 이 둘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대학은 원칙적으로 국·공립이고 평준화되었다. 그러나 대학말고 흔히 그랑드제콜이라 불리는 엘리트 학교들이 있다. 대학에는 바칼로레아라고 불리는 수능시험에만 합격하면 들어갈 수 있지만, 그랑드제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얼마 동안 예비반 수업을 거쳐야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이들 학교 졸업생들이 프랑스 계급 사다리의 상위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서울대 출신자들이 누리는 지위 독점은 꿈꾸지 못한다. 이들 학교의 입학 정원이 적게는 수십 명, 많아야 수백 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에 비해 엘리트라는 자부심은 오히려 더 크겠지만, 실제로 누리는 사회 자본은 더 작은 것이다.

고등 교육에서 사립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한국 상황에 프랑스를 포개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가 실마리는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서울대 입학 정원을 점차 줄여가겠다고 밝힌 것은 방향을 바로잡은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한 해에 4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서는 서울대의 독점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고, 서울대를 향한 전쟁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정원 감축의 속도일 것이고, 다른 상위권 대학이 따라줄 것이냐다. 정총장이 지적했듯, 인구가 2억8천만 명인 미국의 최상위권 10개 사립 대학이 1년에 배출하는 학생이 1만명 남짓인 데 비해, 인구 4천7백만명인 한국의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수는 해마다 1만5천명에 육박한다.

미국의 비율에 맞추어 이들 세 대학의 정원이 지금의 9분의 1로만 준다면, 이 학교들의 엘리트적 성격이 크게 강화되면서도 장기적으로 독점력은 약해져 입시 전쟁의 강도를 낮출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제 살을 깎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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