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닥’ 드러낸 청계천 재개발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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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장 수뢰’ 등 비리 잇달아 밝혀져…세운상가도 의혹 도마에
 
재개발 사업에서 악취가 난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청계천. 냄새의 진원지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건은 청계천에서도 최고 요지로 꼽히는 을지로 삼각동·누하동 일대에서 터졌다. 이 지역은 1995년 말부터 대한주택공사가 재건축을 추진했던 곳.

한화빌딩·장교빌딩·기업은행 등 고층 빌딩이 즐비한 장교동 일대처럼 주택공사는 이곳에 34층 높이 건물 다섯 동을 지으려고 했다. 시행자로 지정되어 중구청에서 건축 허가까지 받았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사업이 연기되었다. 이후 도심재개발계획이 강화된 데다가 땅 매입에 실패해 사업을 중단했다.

2002년 7월 이명박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청계천복원추진본부가 꾸려졌다. 청계천 일대의 지지부진하던 재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삼각동·누하동 일대 금싸라기 땅에 여러 업자가 나섰다. 하지만 땅을 사들이는 작업에 실패했다. 이 지역은 청계천 다른 지역에 비해 땅값이 평당 1천만원 이상 비쌌다.

이때 시행사 미래로RED(미래로)가 등장했다. 미래로는 2003년 3월 땅을 일괄적으로 매입하며, 이 지역 재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땅 주인들을 모두 모아 중도금·잔금 없이 땅값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형식을 취했다. 평당 3천만원이 넘는 후한 가격으로 지주들의 불만을 일시에 잠재웠다. 재개발·재건축 시장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미래로 길회장, 서울시 대형 프로젝트에 ‘올인’

 
이를 위해 미래로 회장 길 아무개씨(61)는 사재와 캐나다 한 은행의 펀딩을 받아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래로RED는 2003년 8월 이 지역 토지를 담보로 우리은행에서 1천3백억원을 빌려 비용을 충당했다. 고도제한 완화 등 사업에 대한 확신이 미리 서지 않고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이 때문인지 부지 주변에서는 ‘배경이 확실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미래로RED는 자본금이 2억4천만원에 불과한, 재개발 시장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회사다. 등기이사에는 회사 회장인 길 아무개씨와 아내, 아들, 며느리가 올라있는 가족 기업이다. 하지만 길회장은 재개발 업계의 숨은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길회장은 전북 진안 출신으로 전주상고를 나왔다. ㄷ대기업에서 줄곧 재개발 사업을 담당해 개발본부장을 지냈다. 길회장은 서울 성수동 재개발사업과 파이낸스센터 재개발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파이낸스센터 재개발은 1984년부터 재일동포 사업가 등 여러 사람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곳이어서, 길회장은 이 공사를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4억 받은 김일주씨는 어떤 역할 했나

길회장의 장남인 길 아무개 사장(35·미국명 스티브길)은 1998년 프로 골퍼 박세리의 매니저를 한 인물이다. 1998년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우승한 직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축하 전화를 직접 받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후에는 2002년까지 한 스포츠 신문의 미국 특파원으로 일했다. 회사 감사인 차남(32)은 공인회계사로 ㅅ회계법인에서 근무하고 있고, 셋째는 캐나다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다. 또 길회장의 동생은 재개발·재건축 분야 전문 변호사로 유명하다.

파이낸스센터 재개발 사업을 성사시키고 1987년 9월 길회장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길회장은 캐나다에서 부동산과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파이낸스센터 재개발과 관련해 서울시 국장 5명이 비리와 연루되어 옷을 벗었다. 시청에 ‘길회장은 국장 다섯을 잡아먹은 사람’이라는 소리가 나돌았다. 서울시 일각에서는 길회장이 법망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했다가 공소시효가 지난 후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검찰 조사 결과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길회장에 대한 서울시 공무원들의 반감은 대단히 컸다. 길회장은 캐나다에서 귀국하자마자 서울시가 생살여탈권을 모두 쥔 대형 프로젝트에 올인했다. 길회장과 서울시 고위층과 유착설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길회장의 한 지인은 “과천 정부청사 재개발 등 초대형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국내에 몇 안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측근은 “국내 유력 인사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발이 너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길씨 부자는 강북 최고층 빌딩을 목표로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사업 초기 청계천 일대의 도심은 건물 최고 높이를 90m로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도심부 및 청계천 주변지역에 대한 발전계획’(2004년 9월)과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기본계획 개정안’(2005년 2월)이 연달아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통과되어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 건립이 가능해졌다. 우선 기본적으로 건물 높이를 110m까지 올릴 수 있었다.

여기에 공원 등의 공공시설 부지를 제공하는 고층 건물에는 층고 제한을 대폭 완화하고, 용적률도 1000% 이내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었다. 부지의 13.38%를 공원용지로 부담하면 125m, 17.85%를 부담하면 148m까지 건물을 올릴 수 있다고 시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원부지 비율과 고도에 대한 기준에 명확한 기준이 없어 공무원의 재량대로 바뀌기도 했다. 

업자측 “돈 건네지 않자 번번이 퇴짜”

미래로는 청계천변에 7백80여 평의 공원을 짓는 대신 인센티브를 받아 148m(지상 38층)까지 건물을 올리고 용적률을 998%까지 올릴 계획이었다. 이는 현재 강북 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종로구 서린동 SK빌딩과 같은 높이다.

고도 제한을 완화하고 인·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교수 출신 두 사람의 역할이 눈길을 모았다. 김일주 전 한나라당 성남 중원 지구당위원장과 양윤재 전 서울시 부시장도 이때 개입하기 시작했다.

검찰 조사 결과 김일주 전 위원장은 “서울시장에게 건물 높이 제한을 완화해주고 인·허가가 빨리 진행되도록 도와주겠다. 이시장을 직접 만나도록 해주겠지만 최소 10억원 정도 든다”라며 돈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위원장은 2003년 9월 성남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길사장으로부터 6억5천만원을 받았다. 이어 김씨는 길사장으로부터 같은 해 10월 2억원, 11월 1억5천만원, 12월 5천만원에 이어 2004년 2월 1억5천만원, 4월 2억원 등을 받았다. 김씨가 챙긴 총액은 14억원이었다.

이명박 시장의 한 측근은 “김씨는 전형적인 사기꾼으로 이시장을 팔아 돈을 챙겼다”라고 말했다. 길회장의 최측근은 “한 달 안에 허가를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에 당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웠나 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를 단순 사기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길회장의 한 지인은 “길회장이 이시장을 만나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연결할 수 있는 인맥이 있다. 김씨 같은 하수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고려대 교육대학원 조교수로 재직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이시장은 김씨가 1990년대 중반 연구위원을 지낸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 1993년부터 현재까지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2002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 때 김씨가 고대 동문 30여 명을 이끌고 이시장 캠프에 합류했으나, 김씨는 이명박 계열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한나라당 내부 시각이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더 크다는 해석도 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출신인 양윤재 부시장은 이시장이 2002년 시장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복원을 내걸면서 이명박 캠프에 합류했다. 검찰에 따르면, 양부시장은 2003년 12월 미래로의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1억원을 받았다. 2004년 2월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기존 설계회사 대신 ㄷ 건축회사와 계약하도록 종용하며 이 건축회사 명의 계좌로 1억원을 더 챙겼다.

이 때 양부시장은 길사장에게 “청계천 복원공사로 당신 회사도 1천억원 이상의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니 미래로가 60억원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길사장측이 60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금품 수수가 알려질 것을 걱정해 길씨측이 돈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은 “길씨가 이에 응하지 않자 양씨가 서울시 부시장으로 임명된 뒤 여러 방법으로 재개발 사업을 방해한 혐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순탄하던 미래로의 재개발 사업에는 이때부터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미래로측이 내놓은 안은 번번이 보류되었다.

2004년 11월7일 미래로는 추가 보상을 요구하는 세입자 100여 명을 몰아냈다. 당시 중부경찰서장이 휴가중이어서 중부경찰서는 미래로측에 집행 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래로측은 용역업체를 동원해 강제 집행하는 데 성공했다. 세입자들은 경찰이 지나치게 미래로의 편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한 경찰 간부도 “이 날 경찰 기동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경찰 간부는 “사고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취한 정상적인 조처였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며칠 후 철거민들은 경찰에 항의해 경찰서에 난입했고, 이 일로 중부경찰서장은 직위 해제되었다. 하지만 미래로의 처지에서는 시청의 인·허가 몇 건을 제외하면 재개발 사업의 걸림돌은 거의 사라진 셈이 되었다.

미래로는 지난해 11월 중구청에 주상복합건물 건축안을 제출하면서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 4월 열린 도시계획위원회에서 길씨측이 제출한 이 일대의 토지이용계획안이 보류되었다. 5월에는 아예 회의에 상정되지도 않았다. 길씨의 한 최측근은 “공무원들이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 가도 이유 없이 퇴짜를 맞았다. 양부시장이 우리 사업을 통째로 빼앗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부터 길씨측은 양부시장을 상대로 행정 소송을 벌일 계획까지 세웠다. 길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년 동안 주상복합건물 신축을 준비해 왔는데 서울시가 이상한 논리로 사업을 지연시키고 있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 조만간 피해 보상을 위한 행정 소송을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검찰이 첩보를 입수해 미래로측과 양부시장 등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검찰은 양부시장 사무실에 대한 압수 수색에서 재개발 관련 청탁 메모 2개 등을 발견했다. 세운상가 재개발과 관련해 한 대기업 간부의 명함에 ‘5천, 5천’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었는데, 뇌물 혐의는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한 검찰 관계자는 “세운상가와 남산 일대는 시정개발연구원 등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처리된 곳이다. 사업안을 상정시키지도 못한 미래로보다 안건이 통과된 세운상가·회현동 업체의 로비 액수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수사는 청계천 복원사업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청계천 주변에서 도심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모두 7곳, 36개의 대규모 재개발 건축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물이 흐르기도 전에 ‘탁류’가 된 청계천이 한동안 서울시청과 이명박 시장의 주변을 흐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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