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에는 ‘칼’이 없다지만
  • 성석제(소설가) ()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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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음식 정담]

 
만약 당신의 고향이 나처럼 경북 내륙이고 고향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별미 음식이 없다면, 같은 내륙 출신이라도 남원에서 온 친구가 추어탕을 말하고 춘천은 막국수를 자랑하고 안동은 간고등어에 헛제사밥, 또 어디의 따로국밥을 이야기할 때 입을 벌리고 마냥 앉아있었다면,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 흔들리면서 그런 대로 고향에서 맛있게 먹었던 것이 밥뿐인가 하고 중얼거리다가, 국이 뭐 있었더라, 찌개는 부침개는 뭐였더라 하다가 갑자기 칼국수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칼국수는 지지난 정권의 대통령이 걸핏하면 내놨다는 그 칼국수와는 다를 것이고, 명동칼국수인가 등촌동칼국수인가 하는 체인점의 칼국수와도 다를 것이다. 대한민국의 어느 지방에나 칼국수는 있고 어느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어먹을 수 있으며 계절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르니 진짜배기 칼국수의 맛이 어떻다 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특별히 추울 것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오지 않으며 덥달 것도 없는 요즘의 하루 같은 어느날, 당신은 조선 시대에 영남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걸어가던 그 ‘영남대로’에 붙여진 이름, 3번 국도변에 있는 경상북도 내륙 소도시의 칼국수를 맛볼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면 뭐 잘난(쉽게 표준화되어 전국적인 지지를 받는) 음식 하나는 몰라도 제대로 된 음식점 몇 곳은 속에 품고 있어야 하는데 그 소도시가 당신이 지나가는 줄 어떻게 알고 가슴 속 깊은 골목 안까지 불러들여 ‘아, 우리의 진미를 맛보시오. 오, 이걸 자시지요’ 하고 권할 리 없으니 당신은 천상 그렇고 그런 맛집 안내 책자나 주말판 신문의 여행 코너에서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북하고도 북부 내륙에는 그런 곳조차 흔치 않으니 길가 간판에 쓰인 대로, 간판의 생김새에 따라, 허기의 강력한 지령에 따라 아무 데나 들어갈 수밖에 없게 생겼다.

그런 당신의 눈에 ‘원조 우리밀 칼국수 ㅈㅊ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면 당신의 운은 나쁘지 않은 셈이다. 그건 무뚝뚝하고 수줍음 많은 그 지방 사람들이 최대한 자신들의 음식을 광고한 것이기 쉽다. 당신이 개천 옆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면 대문 안에 자갈이 깔린 마당이 있고 마당 왼편에 수십 개의 장독이 놓인 장독대, 오른쪽에는 그와 비슷한 면적의 꽃밭이 있고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집은 평범한 한옥을 개조한 것이어서 지붕이 원래 낮고 당신이 들어가 앉은 마루는 길보다 훨씬 낮다. 다행히 길에서 마루가 곧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은 담벽이 있고 감나무가 있어서다. 

그 집의 대표 식단은 물론 간판에 있는 그대로 칼국수다. 집집마다 다른 칼국수가 있는 지방에서 칼국수를 주식단으로 내세우려면 그 칼국수가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이거나 그 지방 사람들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이 식당의 경우는 후자이다.

그런데 너무 그 지방 사람들 위주로 만들어진 칼국수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칼국수가 날라져 오기 전 배추, 배추김치와 된장에 박았다 꺼낸 고추, 무생채 같은 반찬과 먼저 만나게 된다. 된장이 작은 종지에 담겨 나온다.

당신은 시험 삼아 생배추를 된장에 찍어 입에 가져가는데, 그 된장이라는 게 슈퍼마켓에서 사서 먹는 쌈장 종류가 아니고 우리 콩으로 만든 우리 된장이다 보니 좀 짜고 또 색깔도 누렇지만은 않다. 당신을 따라 하던 아이가 배추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앉을 정도로 지방색이 강하다.

시래기무침이 있는데 그건 무청을 말려 두었다가 물에 불린 뒤 간장으로 간을 맞춘 정도로 보인다. 거칠고도 담백한 맛이다. 무생채는 다른 지방과 다를 게 없는데, 어떻든 무생채와 시래기무침은 무에서 나오고 배추와 배추김치는 배추에서 나온 것이며 된장과 고추에 박은 된장도 된장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윽고 기다리던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그릇은 널찍하고 조금 얕은 느낌이다. 그 속의 칼국수는 처음엔 무척 뜨겁지만 오래지 않아 식는다. 그런데 칼국수에 웬 만원짜리 지폐만한 배춧잎이 떠있다. 푹 익은 배추가 들어간 칼국수가 바로 ‘ㅈㅊ식당’의 특징이며, 식당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칼국수 대부분에 배추가 들어간다.

그게 무슨 맛인지는 먹어보면 안다. 하여튼 죽여주는 맛은 아니고 죽을 맛도 아니다. 배추가 어디 사람을 죽이던가, 죽여주던가. 그저 온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깻가루가 조금 뿌려져 있다. 국물이 그리 싱겁지는 않지만 오목한 그릇에 담겨온 양념간장을 조금 넣는 게 좋을 것 같다. 매운 고추, 파가 들어 있는 양념간장은 조선간장이 섞여 몹시 짜니까 조금만 넣어도 된다. 육수를 따로 낸 것 같지는 않다. 하다 못 해 멸칫국물도 내지 않은 듯하다. 밀가루, 배추, 깨, 뜨거움 그게 다다.

‘원조’를 팔아먹고 ‘새 원조’ 음식점 차린 주인

아니, 무엇인가 하나 더 있다. ‘콩가루 집안’ 할 때의 그 콩가루다. 이 지역 출신으로 어릴 때 콩가루를 넣은 칼국수를 먹어본 사람들은 콩가루가 들지 않으면 칼국수가 아니라고 한다. 콩가루가 들어가면, 너무 지나치게 들어가지만 않으면 담백하고 구수하다.

밥이 한 공기 따라와 있는데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지만, 반찬이 다 짜고 국물이 남기 때문에 위가 작은 사람도 한두 숟가락은 말아먹게 된다. 자, 이제 다 먹었다면 일어서면 된다. 값은 4천원.

나와서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당신, 한 오백미터쯤 가다 바로 오른편에 ‘새 ㅈㅊ식당’ 간판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질 수도 있다. 저게 ‘ㅈㅊ식당’ 분점인가, 아니면 성질 독한 동생놈이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고 나가서 차린 집인가.

결론을 빨리 말하자면 그 집은 ‘원조’의 주인이 ‘원조’를 웃돈 듬뿍 받아서 팔아먹은 뒤 오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 보란 듯 따로 차린 식당이다. 칼국수를 파는 건 똑같다. 아, 그 집 칼국수에는 깨말고도 간 돼지고기 가루를 얹어준다. ‘원조’는 철저히 식물성인데 ‘새’는 돼지고기를 얹었으니 다르다면 다를 수도 있겠다. 다른 게 또 있는데 ‘새’에는 멋있는 노래연습장이 지하에 있다.

칼국수에는 칼이 없다. 칼 같은 도리도 없어진 것 같다. ‘새ㅈㅊ식당’ 주인을 보면. 사실 음식 맛은 염치가 절반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점을 갈 때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가는 것이다. 어떻게 ‘원조’를 팔아먹고 나서 ‘새’를 내세워 음식 장사를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더욱 알 수 없는 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새ㅈㅊ식당’으로 차를 운전해 가는 사람이었다.

실상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웬만한 지역의 유명 음식이 있는 거리를 가보면 원조라고 쓰인 간판이 생긴 것부터 꼴불견으로 기관을 이룬다. 그냥 원조로만 성이 안 차는지 ‘진짜, 고향, 옛날, 3대째, 본가’가 덧붙여진다.

누가 정말 원조인지는 각자 가슴에 손을 얹어보면 알 일이다. 그 협잡에 손님까지 끌어들이고 그릇된 원조 맛을 보이고 돈을 받는 것은 죄악이다.

언젠가 전주에 갔을 때 어느 비빔밥 식당에서 ‘한국 원조 음식점 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같은 단체가 한국에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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