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군기가 왜 센지 아십니까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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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창작 시스템+서열·기수 문화+기득권 유지 욕망’이 폭력 불러

 
“왜 개그맨들이 선후배 군기가 세냐구요? 이걸 이해해 주셔야 해요. 가수들은 서로 만날 일이 없습니다.
혼자서 노래 부르고 들어가면 끝이죠. 탤런트들도 자기 촬영만 하고 집으로 가면 되고. 하지만 개그맨들은 달라요. 늘 모여서 아이디어 회의를 같이 하고, 한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까지 동고동락하거든요. 부딪칠 일이 많으니까 질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절대 폭력이 관행은 아닙니다.” 인기 개그맨 박준형씨는 최근 김진철씨 폭행 사건 이후 코미디언들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5월11일 KBS 인기 개그맨 김진철씨가 후배 개그맨 김지환씨를 폭행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진철씨는 KBS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의 최고 인기 코너인 ‘깜빡 홈쇼핑’을 진행하던 중이어서 파장이 컸다.

사건을 수사한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5월4일 김씨는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옥상에 후배 개그맨 14명을 집합시켜 ‘군기 교육’을 했으며. 그 와중에 각목 등으로 김지환을 수 차례 때렸다. 피해자 김씨는 20여 차례 이상 맞아서 나무가 부러졌다고 말했다. 김진철씨는 KBS 개그맨 공채 18기이고 김진환씨는 20기다.

김씨는 경찰 조사를 받던 5월1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 관행이 있다. 20기 후배 중에 튀는 사람이 있었다. 동기 중에 남자가 3명뿐이어서 내가 나서야 했다. 나도 신입 때는 맞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20기 14명 중에서 김지환씨만 맞은 까닭

개그맨 사회의 ‘군기 잡기 문화’는 평소 개그맨들을 사랑해온 팬들에게는 ‘생뚱맞게’ 느껴진다. 흔히 개그맨이라면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KBS 희극인실 조문식 회장은 5월11일 “관행적 폭력은 없었다. 폭력이 이어졌다는 건 말도 안된다”라고 부인했다.

김진철씨와 김지환씨를 중재해 둘을 화해시켰던 개그맨 박준형씨도 “개그맨 생활이 10년에 가깝지만 폭력 사건은 거의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방송계 안에서는 이번 사건을 김진철·김진환 두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시각이 있다.

김진철씨는 김진환씨보다 입사 기수는 선배지만 나이는 네 살이나 어리다. 한때 둘은 방송계 입문 전에 대학로에서 함께 공연을 해왔던 사이다. 5월13일 두 사람이 합의하면서 사건은 정리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 추문을 온전히 개인 간의 문제로 넘기기에는 곱씹어볼 구석이 남았다. 김진철씨가 폭행을 당하던 그 자리에는 공채 20기 후배 14명이 같이 있었다. 공채 20기가 단체 기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 지난 4월 초에도 분장실에서 20기 10여명이 ‘집합’한 적이 있다.

그 때도 김진철씨는 마대자루로 후배 김지환씨를 때렸다. 송파경찰서 형사과 수사담당자는 “10여명이 집합했는데 맞은 사람이 김진환씨 혼자라는 게 이상한 면이 있다. 수사를 방송계 전반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꼭 물리적 폭력 관행이 아니더라도 코미디언 사회가 유달리 선후배 서열을 강조하는 곳이라는 점은 개그맨들도 인정한다. KBS의 한 현직 PD는 “방송계 안의 여러 집단 가운데 가장 군기가 강한 곳이 코미디언실이다. 후배들이 선배를 복도에서 만나면 꼬박꼬박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때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했고 지금 이화여대 언론영상학부에 있는 주철환 교수는 “외국과 달리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은 개그맨들이 합숙 훈련 하듯이 모여 만드는 집단 창작물이다. 특히 내일 방송분을 오늘 녹화하는 식으로 시간에 쫓기며 여유가 없다. 이런 분위기가 선후배 문화, 기수 문화를 만들어낸다. 또 연기자들 간에 경쟁이 심해지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선배들의 욕망도 작용한다”라고 설명했다.

고교·대학에 ‘빳다’ 관행 여전

물론 서열과 기수를 따지는 풍조가 개그맨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탤런트나 성우들도 공채 기수로 선후배를 구분하는 풍토가 남아 있다. 그 뿌리는 대학교·고등학교로 거슬러올라간다. 예술고등학교·예술전문대학·일반대 연극영화과처럼 예비 방송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는 입학 기수를 따져 군기를 잡는 풍조가 있는데 이것이 졸업 후에도 이어진다.

ㅇ예고 졸업생으로 현재 KBS에서 일하는 김 아무개씨(29)는 “학창 시절 언제 어느 곳에서 선배를 만나도 깍듯이 인사해야 했다. 편집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동기 10명이 선배 한 명에게 맞기도 했다. 선배들은 ‘이게 예술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끼가 많고 별난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였고, 나도 선배가 되어서는 그 풍조에 물들었다”라고 말한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연극영화과를 2000년에 졸업한 한 방송국 PD는 “한 여학생이 ‘신성한’ 스튜디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학년 동기들이 모두 집합한 적이 있었다. ‘하늘 같은’ 고학번 복학생 선배들까지 다 오셔서 군기 교육을 햇다.

바로 윗 기수 선배들이 후배 교육을 잘못한 죄로 ‘빳다’(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는 일) 당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서 군기 교육 문화는 사라졌고, 탤런트 사회도 비공채 연기자가 많아 공채 기수 서열이 약해졌다.

주철환 교수는 “선후배 질서를 따지는 사람들은 ‘다 조직을 위한 일’이라며 핑계를 대지만 실제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개그맨 사회도 변화하는 와중에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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