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채널 다시 열고 6자회담 숨 고르기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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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차관급회담, 어떻게 성사되고 무슨 성과 거두었나

 
100% 완벽한 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 때로는 여백도 필요하다. 지난 5월19일 개성에서 막을 내린 남북 차관급 회담이 그렇다. 예정일을 이틀이나 넘기며 핵 문제와 6자 회담에 대한 북한의 명시적 언급을 이끌어내려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으나 북한은 끝내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반쪽 회담’, ‘비료 20만t 주고 끝’ 같은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뚜렷한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쟁위기설이 이번 회담을 계기로 잦아들었다는 점만 해도 커다란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남북대화’의 위력이 확인된 것이다. 남북이 만나 손 한번 잡는 것만으로도 위기설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무형의 성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6·15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에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6·15 5주년을 기념하는 이 행사가 남북관계의 ‘급발진’ 카드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 6월21~24일 서울에서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열기로 함으로써, 정세 변화에 대응할 우리 나름의 구동장치를 확보하게 된 것도 큰 성과다.

에너지 보상은 ‘시혜’ 아닌 ‘의무’

지난해 7월 이후 약 10개월간 북한은 의도적으로 남측을 외면해왔다. 그렇다고 남북관계의 중요성이나 재개 필요성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차관급 회담은 북으로서도 미리 예상했던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한달 반 동안 전개되어온 북·미·중 3국의 고공전투와 노무현 정부의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연적 요소들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회담 이후’를 조망하려면 그동안 어떤 요인들이 작용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공중전에서 지상전으로: 몇몇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상황이 공중전에서 지상전으로 내려왔다고 평가했다. 공중전의 하이라이트는 지난 5월5일 부시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 간의 전화 통화였다.

그 전날인 5월4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다음날 있을 양국 정상의 전화 회담을 중국측과 조율하면서 섬뜩한 얘기를 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미국은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곧바로 북한을 공격하겠다고 통고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이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금지선)임을 분명하게 전달한 것이다.

워싱턴의 한반도전문가는 “북한의 핵실험은 부시 2기 정부가 대내외에 천명한 정책 기조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이를 절대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고한 것이다. 체니를 비롯한 강경파의 압박을 부시 대통령이나 라이스 장관이 계속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지적했다. 라이스가 중국에 통고한 직후 미국 강경파에 의한 언론 플레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5월6일 NBC 방송의 대북 선제공격 계획 수립설을 필두로 한반도 위기설이 고조된 것이다. 

중국의 역공과 오기: 관련 소식통들의 지적을 종합해보면 중국은 라이스 장관의 통고에 대해 내심 상당히 불쾌해 했다. 5월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몇몇 국가가 북한을 궁지에 몰고 있다”라고 한 것도 이심전심의 결과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5월8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핵 문제에서 새로운 상황이 등장’했다고 한 것도 바로 라이스 장관의 발언을 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북 차관급회담(5월16~19일) 합의 사항

1. 평양에서 열리는 6·15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에 장관급을 단장으로 당국 대표단 파견
2. 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6월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서 개최
3. 남측은 5월21일부터 북측에 비료 20만t 제공


중국의 이같은 불쾌감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내심 기대했을 법한 대북 압력 대신 오히려 대북 지원을 확대하겠다며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 추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압력에 대해 중국이 오기를 발동한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딜레마, 지금은 체제 정비중: 그러나 북한은 후 주석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선 강석주 부상 방중 당시 제시한 6자 회담 복귀 조건(<시사저널> 제813호, 5월24일자 참조) 문제 외에도 북한 내부가 현재 격심한 체제개편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중순 이후 국내의 대북 사업자들은 당혹스런 경험을 해야 했다. 북한의 파트너들과 연락이 일절 두절된 것이다. 최근까지도 북한과의 국제 전화 교신은 몇몇 특수 채널을 제외하고는 전부 차단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정보 통제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11일 최고인민회의 이후 내각 중심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정비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각 부서, 기관, 회사 등을 둘러싸고 조직 개편·배치 전환·인사 이동이 폭발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작업이 5월 말 또는 6월 초까지 계속될 예정이어서 이때까지는 대사를 치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열 분위기 냉각시키기: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6자 회담 복귀 선언’이라는 메인 이벤트 이전이라도 분위기를 진정시킬 몇 가지 조처들이 필요했다. 5월8일 북한 외무성이 북·미 양자 접촉에 대해 한결 부드러워진 입장을 발표한 것이나, 지난 5월17일 니혼 게이자이 신분이 보도한 ‘라이스 장관 방북 초청’ 설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라이스 장관을 초청한다는 뉴스는 뜬금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5월4일 라이스의 ‘대중국 통고’에 대한 맞대응이라면 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확연해진다. ‘직접 만나서 얘기 하자’는 뜻이다.

<시사저널>의 취재에 의하면 라이스 장관을 초청하겠다는 의사는 니혼 게이자이 신분이 보도한 것처럼   5월13일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이 라이스 장관에게 전한 것 외에도, 같은 날 북한 유엔대표부를 찾은 디트러니 미국 국무부 북한대사를 통해서도 직접 전달되었다고 한다. 북·미간 채널을 통해서도 미국에 알린 것이다. 라이스가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명분 축적을 위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월19일자 아사히 신분은 디트러니 대사가 5월13일 북한 유엔대표부를 비밀리에 방문해  북한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6자 회담 복귀시 북·미 양자 대화를 통해 안전 보장 및 에너지 지원 등에 협의할 수 있다는 등 미국측 입장을 상세하게 전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이처럼 뉴욕 채널을 통해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라이스 장관의 통고 이후 오히려 중국의 대북 접근이 가속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혹감 속에서 미국도 나름으로 대응 수단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남북 차관급회담 등장: 이처럼 북·미·중 3국이 고공에서 분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통일부 이봉조 차관이 지난 5월12일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남북회담을 북측에 제의했다. 북한 처지에서도 국면 전환을 위한 가시적 이벤트가 필요하던 차에 호재가 등장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거쳤겠지만 뜸들이기 좋아하는 북한이 이틀 만인 5월14일 개성에서 만나자고 호응하고 나섰다. 지난 5월 초 이후 북미중 간에 벌어진 공중전의 양상을 바꾸어 놓을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나름으로는 내부 체제 정비가 끝나는 5월 말 6월 초 이후의 본격적이 게임을 앞둔 숨고르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남측이 또다시 들러리 서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고수는 ‘수 중의 수’를 본다는 얘기처럼 북 핵 빅딜 다음에는 남북관계 심화 발전 국면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문제는 지난 10개월의 대화 단절을 어떻게 부드럽게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절박한 때 비교적 자연스런 방식으로 징검다리를 놓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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