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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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김재규의 지시로 중정 연수생에 의해 파리에서 살해되었다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가 중간 발표를 통해 밝혔지만, 내용 곳곳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아...

 
'한국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이던 김재규 중정부장이 파리에서 연수 중이던 신현진(가명)이라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고, 그 직원은 동유럽 청부살해업자 2명을 고용해 주프랑스 대사관 외교관 관용 차량으로 김형욱을 파리 교외에 납치해 야산에서 권총으로 사살한 뒤 시체는 낙엽으로 덮어두고 총은 현장에서 분실했다. 그 신현진 연수생은 김형욱 암살 공작의 전모를 혼자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이 특수 공작은 이후 30년 가까이 전혀 발각되지 않은 성공적 암살 사례였다.'

지난 5월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발표한 김형욱 사건 중간 조사 결과는 위와 같이 압축할 수 있다. 지난 3개월간 수많은 자료와 관련자들을 조사했다고 밝혔지만 오로지 신현진이라는 당시 파리 연수생의 진술에 의존했을 뿐이다.

국정원은 세간에 구구한 억측과 근거 없는 낭설이 난무해 국민에게 혼란을 주고 진실 규명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이를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중간 발표를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정원의 희망과 달리 이날 중간 발표는 김형욱 사건 의혹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 국정원 발표 내용 중에는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한 방법과 시체 유기 현장에 대한 설명은 프랑스 경시청이나 정보기관의 능력을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현진이 고용했다는 동유럽 출신 청부 살인자 두 사람은 김형욱을 파리 외곽 도로에서 50m쯤 들어간 야산 자락에서 소음 권총 7발을 쏘아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시신에는 낙엽을 덮었고, 권총은 경황이 없어 현장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이 살인청부업자들의 주장이었지만 신현진은 암살 여부 및 현장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이상열 공사의 관용차는 살인청부업자들이 김형욱을 사살하는 동안 길가에 30분 동안 서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력과 수사력을 자랑하는 파리의 경찰과 정보기관은 사건 뒤 김형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매장하지 않고 낙엽으로 덮어둔 김형욱의 시신과 그 근처에 떨어져 있었을 소련제 권총이 그후 26년 동안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국정원은 또 김형욱이 돈을 빌리기 위해 먼저 파리 주재 중정 책임자인 이상열 공사에게 전화를 걸면서 납치 살해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망명 후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다던 김형욱이 파리에서 도박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기에게 안테나를 세우고 있던 중정 요원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접촉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김형욱이 과거부터 이상열 공사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형욱은 이상열 공사와 신씨, 동유럽 출신 살인청부업자 2명이 타고 왔다는 차에서 이상열 공사가 내려 혼자 다른 곳으로 갔는데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차를 타고 함께 갔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직접적인 생명 위협을 받으면서 어디에서건 낯선 이에게는 누구보다도 경계심이 강했다는 김형욱이 순순히 이상열 공사도 없는 차를 타고 사지로 따라 갔다는 국정원의 발표는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이상열 공사는 이 모든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중정과 안기부,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비밀 공작 세계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4대 원칙’이 있다고 한다. 국정원의 공작, 특히 암살과 같은 특수 공작의 세계를 잘 아는 정보기관 출신들은 이번 국정원 발표를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한다. 공작의 ABC 조차 완전히 무시한 발표라는 것이다.

“이번 김형욱 사건 중간 조사 결과대로라면 중정은 예전에 문을 닫았어야 할 조직이다. 하지만 그 중정은 그렇게 허술한 조직이 아니었다.” 2000년에 국정원을 퇴직한 한 전직 중앙정보부 공작 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비밀 공작 4대 원칙 철저히 무시

비밀 공작 4대 원칙이란 조국과 조직에 누를 안 끼치며(합법 조직은 비합법 사업에 절대 가담하지 않는다), 끈을 반드시 차단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애국심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비밀 공작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국정원 발표대로라면 당시 중정은 김형욱 암살 공작을 수행하면서 이 비밀 공작 4대 원칙을 모두 어겼다는 말이 된다. 먼저 신현진이라는 중정의 합법 직원이자 연수생이 김형욱 암살의 모든 과정에 다 개입함으로써 만약의 경우 조국과 조직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는 비밀 공작의 첫 번째 원칙을 어기고 말았다. 비합법 사업(납치 살해)에 합법 조직원이 너무 깊숙이 관여한 것이다.

차단의 원칙 또한 철저히 무시되었다. 신현진씨의 주장대로라면 현장 행동조의 일원에 불과한 그가 최상부 공작 기획 라인 및 온갖 공작 물품의 출처와 그 루트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각되어 한 차례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했던 중정이 이렇듯 허술하게 작전을 짰겠는지 의문이다. 만일 신현진씨가 현지에서 김형욱 납치 암살 과정에 개입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더라도 그가 알 수 있는 범위는 차단 원칙에 의해 제한되었어야 정상이다

다음으로 ‘흔적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낙엽만 덮은 채 현장에 시체를 방치했고, 권총도 분실했다는 신씨의 주장은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나 진배없다. 흔적의 원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신씨의 진술 가운데 ‘압권’은 이상열 공사의 외교관 관용 차량 ‘푸조’를 이용해 파리 시내외를 유유히 돌아다니며 김형욱 납치 암살을 실행했다는 대목이다.

신씨는 자기가 이 관용차를 운전하고 조수석에 김형욱을, 뒷좌석에는 동유럽 출신 청부업자들을 태우고 가 권총을 주어 파리 외곽 큰길가에서 50m 떨어진 야산에서 총을 쏘아 살해하게 한 뒤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발각될 경우 곧바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릴 수도 있는 엄청난 비밀 공작을 수행하면서 아무리 배짱이 좋다고 해도 쉽게 눈에 띄는 외교관 관용 차량을 이용할 수 있었겠는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국정원 발표는 ‘애국심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애국심이 있을 리 없기 때문에 커다란 비밀 공작에는 절대로 외국인을 참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특수 공작 세계의 철칙이라고 한다. 국적마저 불분명한 동유럽 청부 살인업자 2명을 고용했다는 신씨의 주장은 공작 세계에서는 믿기지 않는 주장이다.

이번 조사의 가장 큰 의문은 국정원이 미리 방향을 정해놓고 꿰맞추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김형욱을 자기가 암살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이들은 단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지난 4월19일자 <시사저널>(808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기가 파리 양계장 암살 실행 조장이었다고 주장한, 중앙정보부가 양성한 특수 공작원 이 아무개씨였다.

국정원은 왜 ‘암살’ 자백한 이씨를 외면했나

다른 한 사람은 이번 국정원의 중간조사 결과에 등장하는 신현진이라는 중앙정보부 연수생이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이 두 사람 중 신현진씨만을 조사해 그의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이번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자기가 파리 근교에서 양계장 파쇄기로 김형욱을 암살했다고 주장한 또 다른 중정 비선 공작원 이씨를 그동안 국정원은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씨가 중정이 양성한 특수공작원이라는 사실마저 극구 부인하더니 <시사저널>을 비롯한 일부 언론의 취재로 그 증거가 드러나자 국정원은 나중에 이씨가 공작원임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국정원은 그동안 이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면서 무조건 배척하기만 했다. 신빙성 여부는 그를 불러 조사해야 알 수 있을 텐데 한사코 그의 존재를 무시했다.

만일 이씨가 사실과 다른 주장을 계속 편다면 국가기관과 국민을 혼란시키는 허무맹랑한 행위를 중지하도록 이씨에게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했어야 옳다. 그러나 국정원측은 <시사저널> 인터뷰 기사가 나온 뒤 그를 피하기만 했다. 이씨는 지금도 김형욱을 파리 현지에서 암살한 사람들은 동유럽 청부업자가 아니라 자기와 곽 아무개 후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물론 이씨의 양계장 암살 주장도 아직까지 물증이 없는 주장일 뿐이기 때문에 검증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검증 능력이 있는 국정원은 이씨를 계속 외면하고 있다.

그동안 국정원은 중정 특수공작원 이씨의 존재를 부정해오다가 5월26일 김형욱 사건 중간 조사 결과 발표장에서 기자가 질문을 하자 처음으로 “이씨는 특수공작원이 맞다”라고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이씨의 김형욱 살해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국정원측은 이씨의 주장을 무시해도 될 만큼 확실한, 다른 현장 암살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국정원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국정원에 뭘 원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의 설명(<시사저널> 인터뷰)에 따르면 국정원 상부 조직은 다 빠져 있다”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이씨가 과거 북파 특수공작원 조직을 이끈 팀장으로서 팀원들에 대한 특별법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양계장 암살설을 들고 나왔다고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씨가 김형욱 암살 건을 들먹인다고 해서 자기에게 득될 것은 별로 없다. 만약 파리 양계장 암살 주장이 허위로 드러날 경우 북파 특수공작 활동을 했다는 주장도 자동으로 거짓말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측은 또 그동안 이씨를 조사하지 않은 이유로 그가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중정의 상부 지휘 라인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씨는 그것은 특수 공작 세계를 모르는 소치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씨는 “특수 공작은 차단의 원칙에 따라 나와 나를 지휘한 바로 윗선밖에 몰라야 하고, 설령 알고 있더라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정원이 자기를 불러 협조를 요청하면 알고 있는 지휘 라인은 물론 자기가 가담한 김형욱 암살 사건 진실을 모두 털어놓겠다고 주장해왔다.

국정원의 이번 발표를 보면 이씨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해도 될 만큼 확실한 별도의 현장 실행조는 없었다. 동유럽인 2명을 끌어들이고 권총도 현장에 버려두었으며 시신도 낙엽으로 덮어놓은 채 현장을 벗어났지만 26년간 아무 탈없이 비밀을 지켜왔다는 주장보다는, 특수공작원 출신 이 아무개씨의 김형욱 양계장 암살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국정원의 이번 중간 발표문을 뜯어보면 양계장 파쇄기를 이용해 김형욱을 흔적 없이 암살했다는 특수공작원 이씨의 주장을 은연중에 지나치게 의식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신현진씨는 암살 과정을 진술하면서 동유럽 킬러 두 사람으로부터 김형욱의 시계, 버클(허리띠), 바바리 코트, 지갑, 여권 등을 넘겨받았다고 주장했다.

국회 과거사위원회 재검증 있어야

지갑과 여권을 뺀 나머지 소지품들은 권총 사살을 했다면 시신마저 야산에 방치한 상태에서 증거 인멸을 위해 꼭 회수해야 할 물건이라고 볼 수 없다. 대신 이런 물건들은 양계장 사료 파쇄기로 암살할 경우 증거 인멸을 위해 일부러 빼내야 하는 물건들에 해당한다.

신씨는 시계는 센 강에 버렸고, 바바리와 벨트 등은 집에 가서 가위로 자른 뒤 파리의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밝혔다. 신씨는 친절하게도 파리의 쓰레기통은 수거해가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분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중앙정보부가 양성한 정식 요원(신현진)과 비선 요원(이 아무개씨)의 각기 다른 두 주장은 반드시 진위가 검증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중간 조사 결과 발표로 논란을 잠재우고 싶었겠지만 그러기에는 설득력이 약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국정원이 자초했다. 당초 이씨를 불러 협조를 구하고 진위 여부를 검증해 진상 규명에 적극 활용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지금이라도 이씨를 만나 양계장 암살 주장의 진위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국정원이 이를 끝내 묵살한다면 김형욱 암살을 둘러싼 이씨의 주장과 국정원측 신씨의 주장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과거사위원회와 같은 새로운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재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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