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 역사에 큰 획 긋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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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문고의 ‘우리 시대’ ‘고전의 세계’ 시리즈, 각각 통권 100·50권 돌파

 
교양인을 자처하는 한국인 치고 드레퓌스 사건을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알린 에밀 졸라의 칼럼 ‘나는 고발한다’를 읽어본 이는 거의 없다. 번역된 적도 없다. 책세상문고의 ‘고전의 세계’ 시리즈는 이런 한국적 교양의 틈새 시장을 겨냥했다. 책세상문고는 최근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와 이마누엘 칸트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아베로에스의 <결정적 논고>,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 네 권을 동시에 펴냈다. ‘고전의 세계’ 시리즈의 통권 47~50호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책세상문고가 국내 문고판 역사에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책세상문고의 양대 시리즈 중 하나인 ‘우리 시대’가 지난 4월 통권 100권을 넘긴데 이어, ‘고전의 세계’ 시리즈도 최근 50권째를 출간했다. ‘우리 시대’는 5년 만에, ‘고전의 세계’는 3년 반 만에 이룬 일이다. ‘우리 시대’가 국내 소장 인문학자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지적·문화적 지형도를 다시 그리자’는 의도였다면, ‘고전의 세계’는 말 그대로 고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꾀했다.

서양 근대 음악의 미학을 확립했다는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나 현존 최고(最古) 의학서인 <황제내경> 등이 책세상문고를 통해 고전 반열에 올랐다. 1888년 프랑스 사회주의노동자당 기관지에 실렸던 노동자들의 글을 묶은 <조국이 위험에 처하다>는 고전의 외연을 넓혔다.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이진우 교수(계명대·철학)가 장문의 해제를 붙여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한 것도 흥미롭다. 

‘고전의 세계’ 시리즈 중에는 아예 원본이 없는 책들이 많다. 일종의 ‘부분역’이라는 독특한 번역 시스템 때문이다.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은 <순수이성비판>의 서문만 떼어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헤겔의 <교수 취임 연설문> 또한 헤겔 전집에서 해당 부분만 떼어내 한 권으로 만들었다.

김광식 책세상 주간(47)의 말이다.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은 너무 어려워 전공자가 아니라면 읽기 어렵다. 국내 여건상 저자의 의도를 다치지 않고 축약해 번역할 만한 이도 많지 않다. 그럴 바에야 칸트가 쓴 원문 한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역자의 깊이 있는 해제를 덧붙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순수이성비판 서문>은 본문보다 해제와 각주, 참고 문헌의 쪽수가 훨씬 많다. 텍스트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생애와 사상의 뿌리, 책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에 끼친 영향까지 다각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 편집위원들의 생각이었다.

 
책세상문고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시대’ 시리즈다. ‘우리 시대’ 시리즈에는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처럼 의문형으로 끝나는 제목이 유독 많다. <우리 역사소설은 이론과 논쟁이 필요하다>와 같이 ‘다’로 끝나는 제목 또한 저자의 자기 주장이 확실하게 감지된다. 박정희에 대한 다층적 분석을 시도한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을 객관적으로 반추한 <탄핵, 감시 권력인가 정치적 무기인가> 등은 매우 논쟁적이다.    

‘우리 시대’에는 논쟁적 글 많아

미시적인 주제에 확실한 자기 주장을 담자는 것이 김광식 주간과 김용우(서양사) 김영건(철학) 박철화(문학평론) 편집위원들의 의도였다. 이를 위해 이들은 주제를 정하면 우선 소장 학자들 중에서 필자를 골랐다. 논쟁적인 글의 성격상 교수들은 가급적 배제되었다. 초고를 받은 뒤에는 끊임없는 개고 과정을 거쳤다. 대중적인 글을 써본 적이 없던 필자들에게 문장 쓸 때 참고하라며 유명 산문가들의 책을 안기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학문적 베이스를 갖춘 대중적 글’들이 만들어졌다.

국내에는 현재 6만명이 넘는 박사급 연구자들이 있지만 필자를 구하지 못한 분야도 많았다. 가령 9·11 테러가 난 뒤 편집위원들은 도시 게릴라와 테러 그룹들에 관해 쓸 수 있는 필자를 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우리시대’ 100권째 책으로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이 최근 출간되었지만, 애초 기획과는 다른 글이다). 표절 사건에 휘말려 책을 회수한 적도 한 차례 있었다.

“‘우리 시대’ 시리즈를 출발시켰던 2000년은 인문학의 위기가 구호처럼 떠돌던 시기였다. 우리는 인문학이 아닌 대학의 위기나 교수들의 위기라고 보았고, 대학 바깥에 인문학 캠프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들에게 공격적인, 자기 주장이 확실한 글을 주문했다.” 김광식 주간의 말이다.

대부분의 책이 5천부 이상 팔렸으니, 원고지 5백쪽 안팎의 자기 색깔이 확실한 인문학 책을 단행본 3분의 1 가격에 내놓겠다는 이들의 생각은 상업적으로도 적중했다. 책세상 편집진은 이미 1백50권 이상의 다음 기획을 추진 중이다. 이들의 다음 목표는 책세상문고를 일본의 이와나미분코(岩波文庫)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문고로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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