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는커녕 정신 분석까지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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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신전에서 내려온 영웅

‘족보 정리’부터 하자. 일단 주민등록증을 ‘까고’ 미국 대중 문화의 대표적인 슈퍼 히어로의 계보를 정리해보자. 가장 상석은 짐작했던 대로 슈퍼맨이 차지한다. 프로젝트명 ‘슈퍼맨 리턴스’에 의해 2006년 완성을 목표로 리모델링 중인 <슈퍼맨>은 1938년 출판 만화로 태어났다. 둘째는 <배트맨>(1939년)이다. 세번째 자리는 미국 슈퍼 히어로 중 흔치 않게 여성인 <원더우먼>(1942년)의 몫. 그 다음이 <스파이더맨>(1962년), 마지막이 <엑스맨>(1963년) 순이다.

이들을 모아서 ‘독수리 5형제’를 만들면 천하무적, 필승불패의 드림팀이 될 테지만, 늘 티격태격할 가능성이 높다. ‘아메리카’라는 울트라 슈퍼파워를 가진 아버지가 거칠 것 없던 호전적인 청년 시절, 전란과 냉전 중에 낳은 자식들이지만,어머니도 각기 다른 데다 각자 출생의 비밀도 따로이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맏형답게 카리스마와 파워가 넘치지만, 강한 윤리 의식으로 무장한 마초가 될 가능성이 짙다. `바른생활맨` 타입이다. 원더우먼은 이런 큰 오빠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예쁘고 섹시하며 재주도 많은 누이겠지만,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은 맏형에게 매번 반항하는 `문제아` 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파이더맨(2편)은 비정규 계약직 날품팔이 인생으로  비실비실하다가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고, 엑스멘은 타고난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웅 중 가장 독특한 영웅은 배트맨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거리가 될 만한 녀석은 둘째인 배트맨이다(독수리 5형제에서도 늘 둘째가 말썽이었다). 배트맨은 출신부터 의심스럽다. 외계인(슈퍼맨)이나 ‘인간 돌연변이’(스파이더맨, 엑스맨), 아마존 여신의 후손(원더우먼) 등 명백한 출생 기록을 가진 초인들과 달리 배트맨은 출생증명서도 없는 데다 인간 특유의 어둡고 우울한 성격마저 가지고 있다.

 팀 버튼 감독(1, 2편)은 이 이상한 영웅의 자아 정체성을 더욱 흔들고 세계에 대한 회의감을 증폭해 놓았다. 다행히 조엘 슈마허 감독(3, 4편)이 비교적 단순 명쾌한 논리로 브루스 웨인을 강박증에서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고 큰형 슈퍼맨과 비슷한 성격으로 개조해 놓았다. 

거기서 끝? 아니다. 프로이트적인 치료의 핵심은 정신병의 최초 발생 지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메멘토> <인썸니아>에서 발군의 연출력을 보여주었던 크리스토퍼 놀런이 배트맨의 정신을 분석하는 주치의로 나섰다. <배트맨 비긴스>(6월24일 개봉)는 전편의 이야기에서 연속되는 속편, 즉 시퀄(sequel)이 아닌 전편의 전사를 다루는 프리퀄(prequel)이다. 이제 배트맨의 탄생과 관련된 모든 비밀이 드러난다. 

첫번째 가졌던 의문점. 스파이더맨은 거미에 물리고, 헐크는 잘못된 실험 때문에, 슈퍼맨은 외계인이니까 엄청난 파워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배트맨은 어떻게 초능력을 얻게 되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뼈를 깎는 육체적 훈련과 정신적 수양, 약간의 사기술(예를 들면 펑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능력 따위)에 의한 후천적인 결과로 설명한다. 여기에 더해진 배트카와 배트 수트 등의 위력적인 무기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양심적인 대기업가’였던 아버지가 비밀리에 개발하던 첨단 무기로 설정된다.

그럼 브루스 웨인의 우울증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 부른 화였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다. 이 자책감은 아버지를 쏜 강도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으로 변하고 이는 뼈를 깎는 훈련을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물론 이 자책감과 사적 복수심조차 여자 친구와 집사의 도움으로 ‘공적인 정의감’으로 승화한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왜 호랑이나 사자나 독수리 혹은 쥐나 바퀴벌레, 지렁이도 아닌 박쥐인가에 대한 해답도 밝힌다. 결국 배트맨을 신비로운 숭배의 제단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게 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노력파’인 인간 배트맨을 창조함으로써 영웅에게서 신비롭고 낭만적인 후광을 벗겨냈다.

반면 영웅 시리즈의 방계 계보에 들 법한 영웅 애니메이션계에서는 배트맨과 반대되는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보수적인 디즈니와 픽 사가 손잡고 제작한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서는 노력에 의한 후천적인 영웅이 ‘악당’으로 설정된다. ‘영웅은 신에 의해 택함을 받은 존재이므로 모든 평범한 인간들은 넘보지 말지어다’라고 일종의 영웅 선민의식을 보여준다.

한국영화 속의 영웅은 어떤 모습?

 
할리우드에서 눈을 돌려 보면 한국 영화 <천군>(7월15일 개봉)이 있다. <천군>은 핵무기를 공동 개발하던 남북 연합군이 벼락을 맞고 16세기 임진왜란 직전 조선으로 거슬러올라가 청년 이순신을 만난다는 내용.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작품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순신이 28~32세 청년기에 ‘무과에 떨어지고 자포자기, 건달처럼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낸다’고 가정한 내용이다.

할리우드의 ‘~맨’과 달리 ‘~장군’이나 ‘~의사’가 전부인 한국의 영웅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는 ‘성웅’을 인간으로 끌어내린 영화에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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