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 비리로 잦아든 브라질 ‘노풍’
  • 부에노스에이레스 · 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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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 대통령 지지율 2년 반 만에 최하...“내 살 도려내겠다” 다짐하며 반전 시도

 
2003년 1월 출범한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정부가 최근 연이은 부정 폭로 사건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오른팔 호세 디르세우 수석 장관을 비롯해 십수 명의 고위 측근들이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물러났다. 룰라 대통령은 ‘부정은 집권자에게 악몽, 국민에게 수치’, ‘내 살을 도려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며 대대적인 내각 개편을 단행했지만, 2006년 총선을 앞둔 브라질 정국의 파고는 여전히 높고 험하다.

룰라 대통령 주변의 구린내는 지난해부터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여론에 밀려 물러난 룰라 정부의 의회 문제 담당관 왈도미로 디니스가 스타트를 끊었다. 그가 지난 2002년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현 집권당인 브라질 노동자당에 선거 자금 기부를 요구했던 사실이, 몰래 카메라를 통해 뒤늦게 폭로된 것이다.

같은해 7월에는 브라질 중앙은행 고위 관리의 탈세 혐의가 불거졌다. 빗발치는 고발 사태로 중앙은행의 제2인자가 사퇴했으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마침내 지난 4월, 브라질 검찰총장은 ‘외환 불법 거래 및 송출’ ‘달러 세탁’ ‘선거 사기’ 등의 혐의로 메이렐레스 중앙은행장과 로메오 후카 장관 사회보급부 등을 기소했다. 이어서 지난 5월 브라질의 한 주간지가, 체신국,재보험원 등 국영 기업에 부정 행위를 일삼는 정부 고위 관리 조직이 암약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이 조직이 1천5백만 달러어치 컴퓨터 장비의 입찰 조건으로 업체에 뇌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음성 녹음,동영상 등 물증이 제시되었고, 뇌물 스캔들에 연루된 기업주가 룰라 대통령의 친구라는 보도도 잇달았다.

결정타는 브라질 근로자당(PLB)의 로베르토 제페르손 하원 의원의 폭로였다. 제페르손 의원은, 브라질 집권당이 지난 1월까지 약 2년간 월 1만2천5백 달러의 ‘과욋돈’을 브라질 근로자당의 동맹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뿌려왔다고 주장했다. 제페르손은 이 때, 룰라 대통령에게 직접 이 사실을 알리자,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며 대통령이 울먹였다고 증언했다.

권력 주변 구린내 잇달아 폭로

폭로는 6월에도 잇달았다. 브라질 주간지 <베야>는 브라질 공무원들이 가짜 아마존 산림 채벌권을 발급해 선거 자금을 만든 사실을 폭로했다. 브라질 연방 경찰이 체포한 아마존 불법 채벌단 가운데, 브라질 집권당 간부이자 브라질 환경 관련 국가 기관의 수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제페른손 의원이 ‘다른 동료 의원에 대한 과욋돈 살포’ 사실을 폭로하자 브라질 국회에는 특별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부패 사건에 대한 룰라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가 작용했다. 브라질 국회 의석 분포나 국회의원 연루 범위 등을 감안할 때, 조사단 구성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룰라 대통령이 용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당시 예정되어 있던 베네주엘라,콜롬비아 방문 계획도 취소한 채 대국민 담화를 통해 ‘부정은 집권자에게는 악몽, 국민에게는 수치’라고 규정하며, 각종 부패 사건에 ‘내 살을 도려내겠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브라질 국민들은 그의 발언을, 최측근 호세 디르세우의 사표를 수리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였다. 6월 말 현재 이 사건으로 브라질 고위 관리 14명이 물러났지만, 내 살 도려내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룰라 정부의 최고 실세 호세 디르세우는 50대 정치인으로, 청년 시절 브라질 군정 아래에서 지하 학생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쿠바로 망명해, 게릴라 교육을 받고 브라질에 재입국한 바 있다. 그 뒤 현 브라질 집권당인 노동자당에 입당해 당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룰라가 대통령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회에 복귀해 대통령을 계속 돕겠다’는 것이 그가 물러날 때 던진 최후의 사퇴의 변. 룰라는 이를 ‘고귀한 영웅적 결단’이라고 칭송했었다.

룰라와 노동자당은 ‘적과의 동침’ 중

2006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당과 정부의 간극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의회 내 정치 공간을 확보하려는 브라질 노동자당과, 붕괴된 내각을 추스르려는 룰라 다 실바 대통령 간의 괴리’라고 표현했다. 브라질 일간지 클라린은 룰라 대통령의 시국 담화에, 경제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둘러싼 현 룰라 정부 내의 입장차를 무마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같은 내분 외에 민심 이반도 룰라 대통령의 입지를 좁히는 요인이다. 집권 2년 반째를 맞은 룰라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급강하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룰라 대통령은 지금 당장 선거를 치를 경우, 1차 선거에서도 패배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대통령과 소속 정당의 관계는 ‘적과의 동침’일 경우가 많다. 크고 작은 문제로 대통령의 정치력 약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룰라 대통령은 지금까지 집권당은 물론, 다른 정당과의 관계도 민주적으로 풀어온 유능한 대통령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룰라의 ‘동맹 정책’은 좌파가 집권한 나라에서 보기 드문 모범 사례라는 소리도 들어왔다. 하지만 지난 1년 사이 줄줄이 이어진 각종 부패 스캔들을 통해 룰라 식 ‘동맹 정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룰라 대통령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이웃 국가들은 ‘룰라의 좌파 실험’이 어떻게 귀결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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