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쾅’ ‘쾅’ 이유 있었네
  • 양정석 (굿데이E&I 도쿄특파원) ()
  • 승인 2005.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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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쪽 공 자신감 주효, 전반기 홈런 22방…“올해 안에 자존심 완전 회복”

 
이승엽(29)이 선발로 나간 뒤 9회 초 마지막 타석에서 상대팀이 왼손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자 오른손 대타와 교체되는 상황이었다. 포수 출신으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해설가는 조금 격앙된 어조로 몇 마디를 토해냈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네요. 이렇게 하면 동기 유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지바 롯데 보비 밸런타인 감독의 ‘이승엽 기용법’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일본의 야구 해설가들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기용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 아주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이승엽은 일본 프로 무대 2년째 자신의 잠재력을 현지의 야구 전문가들로부터도 확실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럼 일본 진출 첫해였던 지난해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승엽은 올스타 이전까지 전반기 73경기(전체 90경기)에 출전해 22홈런을 기록하며 부활의 막을 힘차게 걷어 올렸다. 요즘 일본 언론에서는 ‘이승엽이 히토마와리(一回) 변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히토마와리’는 십이지(十二支)의 한 바퀴를 의미하는데, 지난 시즌과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경이로움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승엽의 달라진 대응력은 시즌 초 일찌감치 확인되었다. 지난 4월6일 세이부의 오른손 투수 시바사키 가즈히로, 2주 후 니혼햄의 오른손 투수 마이클 나카무라를 상대로 한 몸쪽 공 홈런이 단적인 예였다. 그리고 7월6일 니혼햄전에서 가네무라 사토루의 뚝 떨어지는 포크볼을 공략한 19호 아치. 지난해 이승엽을 그토록 괴롭혔던 두 가지 큰 과제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다. 몸쪽 공에 대해 이승엽은 “일본 투수들이 실투로 내 몸을 맞힐 위험은 없다. 그만큼 컨트롤이 좋기 때문에 ‘데드볼’을 두려할 필요가 없다”라고 정리된 생각을 말한다.

지난해 몸을 스치듯 파고드는 공에 소스라치듯 놀라 뒤로 물러서는 장면은 어느새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그만큼 어떤 코스의 공이든 여유를 갖고 끝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즉 선구안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변화구에 대해서는 투수들마다 무기로 갖고 있는 특정 구종이 눈에 익으면서 유인구를 파울로 커트해내는 능력이 생겼다. 볼카운트나 주자 상황에 관계없이 변화구를 즐겨 구사하는 일본 투수들의 투구 패턴에 적응해 직구·변화구의 배합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승엽이 부활한 비결로 간결해진 스윙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승엽의 홈런 스윙은 지난해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따금씩 풀스윙이 아니라 타이밍 잡기에 포인트를 맞춘 ‘프리배팅식 홈런’이 콤팩트 스윙으로 비쳤을 수 있다. 이승엽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새 공략법 찾기에 몰두해 일본 투수들의 까다로운 변화구를 요리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상체 단련에 힘을 기울였다. 순발력을 높이기 위해 상체의 민첩한 움직임과 함께 배트 스피드를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나름의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이승엽이 지난 5월 인터리그를 시작하면서 방망이를 950g 안팎에서 900g짜리 초경량으로 바꾼 것도 이같은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승엽은 프로에서 올해처럼 장기간 900g짜리 방망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방망이의 그립도 손잡이 끝을 각지게 파낸 양파형에서 경사지게 깎아냈다. 그립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방망이 맨 끝에 위치한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힘이 빠져 스윙이 지난해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승엽은 초경량 방망이를 들고 인터리그서 12홈런을 기록해, 홈런 랭킹 공동 1위에 오르며 ‘대포 레이스’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이승엽에게 올 시즌 고비도 있었다. 인터리그서 펄펄 날던 페이스가 6월 말부터 뚝 떨어진 것이다. 5경기에서 15타수 1안타로 부진한 적도 있다. 그나마 장기 슬럼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 수는 적어도 팀 승리를 부르는 기여도 만점의 ‘한 방’을 심심치 않게 터뜨렸기 때문이다. 지바 롯데에 ‘이승엽이 홈런을 치면 이긴다’는 승리 방정식이 탄생할 만큼 선제포·동점포·역전포 등 의미 있는 홈런이 늘어나면서 타율 저하의 우려를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다. 일시적인 침체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승부사 역할을 해냈다는 것도 지난해와는 또 다른 점이다.

투수도 마찬가지이지만 타자 역시 한 시즌 1백30경기 이상을 치르면서 몇 차례 고비를 맞는다. 문제는 슬럼프로 빠져들지 않을 만큼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이승엽이 인터리그에서 한참 잘 나갈 때 김성근 전 LG 감독(현 롯데 코디네이터, 이승엽 전담 코치역)은 “지금보다 타격감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절대 지난해같이 우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김성근 감독은 강압적인 훈련을 싫어하는 이승엽이 하루 1,000개씩 스윙을 하며 손바닥의 허물이 세 번 벗겨졌어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을 만큼 정신 무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승엽은 7월20일 니혼햄전에서 시즌 첫 스리런 홈런(시즌 22호)과 2루타 2방으로 5타점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되찾은 채 기분 좋게 전반기를 끝냈다. 한 시즌 동안의 컨디션 곡선을 생각해볼 때 이승엽으로서는 상승 단계에서 후반기를 맞아 홈런 레이스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명 타자 신세가 후반기 성공 최대 걸림돌

이승엽이 올 시즌 터뜨린 홈런의 내용을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6월 중순까지는 거의 솔로포만 터뜨리다가 최근에는 2점 홈런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첫 스리런이 7월20일의 22호였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의 중압감에서 조금씩 해방되고 있다는 좋은 증거다. 비거리도 최근 들어서 점점 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일본 프로 야구는 올 시즌 ‘타고투저’ 해소와 ‘재미있는 야구’를 한다는 명분으로 국제용 수준과 엇비슷하게 야구공의 반발 계수를 끌어내렸다. 일명 ‘날지 않는 공’이다.

그동안 사용했던 공보다 평균 비거리가 2m 정도 줄었다고 하지만 이승엽은 7월4일 도쿄돔 니혼햄전에서 스탠드 위의 광고판을 직접 맞히는 150m짜리 초대형 홈런을 쏘아올리는 등 최근 들어 비거리 130m가 넘는 홈런이 많아졌다. 방망이가 가벼워졌지만 파워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배트 스피드가 향상된 것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과연 이승엽은 올 시즌 남은 경기에서 어떤 성적을 남길까. 물론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계에 대한 믿음이 강한 보비 밸런타인 감독이 여전히 이승엽과 왼손 투수의 대결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100% 붙박이 풀타임리거로 기용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달리 생각하면 전반기 성적표는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거둔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주로 지명타자로 뛰고 있는 이승엽으로서는 사실상 주전 수비 자리를 굳히지 못했다는 부담감도 있다. 1루 자리를 후쿠우라 가즈야에게 빼앗긴 채 외야수로 변신해, 이따금 좌익수로 나가기도 하지만 여전히 수비 불안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악조건을 모두 극복하면서 사활을 건 승부를 벌여야 하는 것이다.

올 시즌 시작되기 전 이승엽은 “일본에서 반드시 성공한 뒤 다음 거처를 생각하겠다. 올해는 내 인생 전부를 건 승부다”라고 말했다. 한국 최고 타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완전히 되찾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서는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성공이라는 말에 걸 맞는 성적에 대해서 이승엽은 “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성적표 아니겠냐”라며 말을 아꼈다.
이승엽에게는 다음 달 2세가 탄생한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털어놓을 만큼 마음 고생이 심했던 지난해, 이승엽은 절대 2세에게 야구를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들을 낳는다면 한번 시켜보고 싶다”라고 슬쩍 말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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