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1백회 맞은 MBC <즐거운 문화읽기>에 보내는 ‘즐비어천가’
  • 고재열 기자 (scoosisapress.comkr)
  • 승인 2005.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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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란 유법불가 무법역불가’

난을 치는 데 있어서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법칙이 없어서도 안 된다는 추사 김정희의 이 말 만큼 MBC <즐거운 문화읽기>(이하 즐문)를 잘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 지난 7월7일로 방송 1백회를 맞은 즐문은 판에 박힌 문화프로그램의 제작방식을 탈피해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주었다.


‘필요 없는 기준은 따르지 않고 필요한 기준은 만들어서 지킨다’는 것이 그동안 즐문을 곁눈질하며 파악한 장수 비결이다. 이 ‘즐문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올해의 책’ 선정이다. 즐문은 올해의 책을 선정하면서 권위와 과학에 기대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의 추천도, 어떤 통계자료의 도움도 없이 임의로 선정한다. 오직 하나, 즐문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적합한 책이어야 한다는 기준만 따를 뿐이다. 기준의 모호함, 그것이 바로 <즐거운 문화읽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경기대 박성봉 교수(다중매체영상학부)와 MBC 김지은 아나운서는 즐문에서 ‘문화 읽어주는 남자와 여자’ 역할을 맡고 있다. 시청자를 위해 눈높이를 사정없이 낮춘 박교수와 김아나운서는 고담준론을 버리고 ‘맛있는 수다’를 선택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이해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솔직한 진행에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미학을 전공한 교수와 미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나운서의 고담준론이 펼쳐질 때, 시청자의 선택할 길은 분명하다. 바로 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문화를 읽어주다 보면 늘 감정이 북받쳐 올라 사자후를 토해내는 돈키호테 교수와 이를 묵묵히 받아주며 문화예술 작품에 프리즘을 대고 다양한 결을 느끼게 해주는 햄릿 아나운서 덕분에 즐문은 시청자와 호흡할 수 있었다.


사실 김지은 아나운서는 시청자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 안목을 감추느라 조금 손해보는 측면이 있다. 구력이 만만치 않은 미술품 콜렉터인 김 아나운서는 스물한 명의 신진 현대미술가들을 소개한 <서늘한 미인>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박교수와 게스트가 쏟아내는 말을 받아주느라 정신없는 김 아나운서는 풀어내지 못한 말을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쏟아내고 있다. 


즐문은 새로운 문화프로그램이다. 주류의 ‘오만’과 미디어의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즐문에는 주류의 곰팡내가 없다. 즐문이 선택한 길은 문화 예술에 대한 ‘마이너리티 리포트’이다. 즐문은 대가와 주류에만 맞춰졌던 스포트라이트를 과감히 신예와 비주류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밝히는 국정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즐문은 양지에서 일하며 음지를 밝힌다. 특유의 역동성과 화려한 비주얼로 문화예술프로그램에서 늘 상석의 위치를 차지하던 공연계는 즐문에서는 다소 찬밥 신세다. 대신 그동안 카메라 세례를 그다지 받아보지 못했던 비주류 예술과 비주류 예술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미술계도 대표적인 즐문의 수혜그룹이다. IMF 이후의 극심한 미술시장 불황으로 움츠려들 대로 움츠려든 작가들의 어깨를 즐문은 어루만져 주었다. 여기에는 ‘모던뽀이’ 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 TV 역사상 가장 박학다식한 리포터로 기록될 그는 즐문팀을 이끌고 우리 미술계의 변방을 탐방하며 작가들을 알렸다.


우리 미술시장의 구조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작가와 일반인 사이의 시차였다. 작가들은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따라 저만치 앞서 가는데 우리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교과서 미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즐문의 부지런할 발걸음은 작가와 일반인의 시차를 줄이는데 일조했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 미술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아마 백남준 정도에서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도의 화가 이왈종, 고뇌의 화가 오병욱, 오방색의 화가 오승윤, 섬진강 지킴이 송만규 등의 화가를 소개한 즐문은 시청자들에게 우리 미술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고 시차를 줄여 주었다.


즐문은 ‘지금 우리’ ‘지금 여기’를 말하려는 화가에 특히 주목했다. 임옥상의 조소 작품과 최병수의 걸개그림을 소개함으로써 신학철의 ‘모내기’ 이후에도 화가들이 세상을 향해서 양심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최병수 작가에게는 병석까지 쫓아다니며 그의 인생을 담아냈다.


즐문은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포착하고 이를 추적하는 데에도 부지런했다. 동양화에 대해서 매난국죽만 생각하던 시청자들에게 ‘동양화의 누벨바그’를 알리기도 했다. 붓 대신 마우스를, 화선지 대신 모니터로 수묵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이소영 작가, 먹대신 아크릴 물감으로 수묵화 정신을 표현하는 이주원 작가, 족자에 생리대를 부친 몽유생리도 등 동양화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펼치는 젊은 작가들을 만났다.


백남준으로부터 발원한 비디오 아트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단순히 영화나 다큐멘터리로 규정지을 수 없는 디지털 영화, 비주얼 랩, 영상 퍼포먼스, 비디오 포엠, 웹아트까지 카메라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가 영화와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전했다.


예술활동과 마케팅을 일치 시킨 동구리 권기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똥을 만드는 똥 예술가 정진아, 기계생명체를 예술로 만들어낸 로봇작가 최우람, 그리고 청계천 소품의 도록을 만들고 비닐텐트에 그림을 그리는 배종헌 등 젊은 문화게릴라의 창작 실험도 즐문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이철수 남궁산 등의 판화가, 김영갑 백남식 등의 사진가도 대표적인 즐문의 수혜그룹이지만 즐문의 가장 대표적인 수혜그룹은 바로 만화가들일 것이다. 길창덕 선생의 ‘만화인생 50주년 기념전시회’에 가서 경의를 표한 것을 비롯해 박재동 허영만 이희재 오세영 신일숙 김동화 등의 작가를 소개했다. 정말이지 감사 만화라도 한 편 그릴 일이다.


만화를 유난히 편애했던 즐문은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시대의 백수만화가에게까지 카메라를 들이 댔다. 즐문은 백수만화가들을 통해 디지털룸펜들의 ‘백수문화’를 살폈다. 백수만화가들이 백수만화를 그려 백수 상태를 벗어나는 아이러니를 통해 즐문은 신세대가 그들 이 어떻게 ‘시대의 우울’을 극복하는 지를 살폈다. 


즐문은 문화예술계의 미아보호소 노릇을 잘 수행했다. 어머니(관객)를 만나지 못한 미아(작가)들에게 어머니를 찾아준 것이다. 소외된 장르의 소외된 예술가들을 찾아 나서자, <즐문>은 문화예술가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아, 우리나라에 저런 예술가가 있었구나’ 하고 보게 된 것이다.


즐문이 용감하게 개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안목에 대해 확신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즐문은 자신들의 카메라를 믿었다. 예술가의 삶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댄 그들은 예술가의 삶 속에서 진정성을 확인하고 이들을 시청자에게 소개했다. 진정성이 있는 삶에서 진정성이 있는 예술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문화부 기자들이 자주 망각하는 것이 있다.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서만 묻는 것이다. 작가는 작가지 평론가가 아니다. 작가에게 왜 작품에 대해서만 물어야 하는가? 어쩌면 작가에게 인생을 묻는 것이 작품에 대한 더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즐문이 담아낸 작가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은 어떤 평론보다 그들의 작품을 더 잘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즐문이 다룬 예술가의 삶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사진가 고 김영갑씨였다. 바람이 되어 제주도 중산간 지방을 찍다 고독하게 삶을 마감한 사진가 김영갑씨의 외마디 절규.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외마디 절규는 뭉크의 절규 보다 내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즐문이 유독 선호하는 코드도 있다. 바로 자폐다. 예술에 대한 짝사랑이 세상과의 소통을 가로막은 작가를 즐문은 병적으로 사랑했다. 첩첩산중에 처박혀 자급자족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 있는 작가라면 ‘즐문’ 섭외 영순위 작가다. 영상 매체의 효험을 못 본, 효험을 본다 한들 그들의 삶이나 작품이 그리 달라지지 않을 심지 굳은자라면 즐문에 나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대충 만족시키는 셈이다.


1백회를 이어올 수 있었던 즐문의 중요한 비결로는 상상력을 빼놓을 수 없다. ‘느림을 찾는 사람들’ ‘혼자놀기’ ‘쿨’ 등의 다루며 문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대중가수 김C에게 문화이론을 말하게 하고 아이들이 당송시로 랩을 하게 하는 즐문의 상상력은 새로운 문화예술프로그램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미술이 꼭 그림일 필요가 있는가? 때로 노래가 되고 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흔히 문화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1년 남짓 즐문을 훈수 두며 깨달은 것이 있다. 문화는 느끼는 것,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의 핵심은 뭔가 한 번 해보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1백회 소감을 물었을 때, 박 교수는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문화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꾸 무언가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 무언가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계속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들도 나처럼 뭔가 만들어보려는 욕구가 생기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의 말에 나는 뇌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나도 그런 충동을 느꼈으면서 그런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명심하자, 아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고, 즐기는 것보다 해보는 것이 낫다. 문화는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를 직접 해보는 것이다.

 

주) <월간미술> 8월호에 보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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