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84% “스트 레스로 고통받는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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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이 CEO 93명의 ‘스트레스 지수’를 설문 조사한 결과, 그들은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CEO(최고경영자), 그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들 내면 어느 구석에 꽁꽁 숨겨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비즈니스 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피투성이가 된 그들이 스스로의 상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기업이 열냥이라면 CEO는 아홉냥’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한 기업의 운명을 좌우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CEO와 반대로 건강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CEO가 내린 결정이 같을 수 있을까. CEO가 건강해야 기업도 건강해질 수 있다. 이것이 <시사저널>이 ‘CEO와 스트레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문조사를 한 이유다.

설문지 작성과 분석에는 CEO를 비롯한 주요 의사결정자의 정신 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일부 서비스 업종을 제외하고는 100인 이상 사업장의 CEO들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e메일을 이용해 1천명 남짓한 CEO에게 설문지를 보냈는데, 93명이 답변을 보내왔다.

‘별 걸 다 묻네요. CEO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인데…’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답변을 보내온 이도 있었고,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회사 내에서 복잡한 일이 많아 답변할 여유가 없습니다’라는 내용만 적어 보내온 이도 있었다.

그나마 정신적 여유가 있는 CEO라야 이번 설문에 참여할 수 있었음을 엿보게 한 편지였다. CEO의 대다수는 이번 설문 조사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내면의 상처는 더 깊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조사했나
누구를: 100인 이상(제조업 기준) 사업체의 CEO 93명(아래 참조)
어떻게: 구조화한 설문지를 이용한 e메일 조사
언제: 2005년 7월 11~21일

 
역시 그들은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신의 스트레스 지수를 0~10 사이의 숫자로 표현하라(0:스트레스 없음, 10: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스트레스)’는 질문에 CEO 10명 중 8명(84.0%)이 ‘5’ 이상이라고 답했다.

‘7’이라고 답한 이가 31.2%로 가장 많았고, ‘8’과 ‘9’라고 답한 이도 각각 19.4%나 되었다(표 참조).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스트레스를 ‘10’으로 표현한다면, ‘5’ 정도만 돼도 심각한 수준이다.

‘9’나 ‘10’은 사람이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스트레스다”라고 설명했다. 
CEO들의 스트레스 자가 진단이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심각한 상태임을 확인해주는 대목이 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신체적인 고통까지 뒤따르게 마련인데, CEO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주 2회 이상 또는 1개월 이상 지속되는 증상에 표시하라’는 설문에 답변자 93명 가운데 10명만 빼고는 모두 뒷목이 뻣뻣하고 결림, 잠을 못 자거나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더 자고 싶
 
은 욕구, 눈이 쉽게 피로하거나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따위 증세를 느낀다고 답했다. 특히 답변자 10명 중 2명 이상(24.7%)은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정혜신씨는 특별한 질병이 없는데도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CEO 재직 기간이 길수록 스트레스가 심했다.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한 수준인 ‘8’이라고 응답한 이 가운데는 재직 기간 3년 이상인 CEO가 가장 많았다(30%).
 
CEO 직을 버리고 싶을 만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CEO들의 직업 만족도는 매우 높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는가’라는 질문에 거의 모든 CEO(97.9%)가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보통이다’ 또는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이는 단 2명이었다.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취감’(91.4%) 때문이다.

이처럼 만족도가 높은데도 ‘현재의 일을 가장 심각하게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은 언제인가’를 물은 질문에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답한 CEO는 10명에 불과했다. 경영 실적이 나빠서 비난받을 때, 건강이 위협받을 때 그만두고 싶었다고 밝힌 CEO가 각각 19.4%로 가장 많았다.

직원들과 불화가 생겼을 때(10.8%)나 열정이 사라졌을 때(8.6%)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는 CEO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할 때 CEO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일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갖는 것이다.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기업 내 최고의 권한과 책임을 가졌으니 거기에 쏟아붓는 정신적 에너지만큼 스트레스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CEO 10명 중 8명(83.9%)이 1주일 동안 결정해야 하는 주요 의사 결정 건수가 적어도 10건 이상이고, 자기보다는 회사나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보니 스트레스 강도는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라는 질문에 CEO 절반 가까이(47.3%)가 회사라고 답했고,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이는 9.7%였다. 나를 위해 일하는 이는 10명 중 4명(37.6%)이 채 되지 않았다. 정혜신씨는 “자기 통제권이 약할수록 에너지 소모가 늘어나게 마련이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그만큼 자기통제권이 없고 스트레스가 높을 수밖에 없다”라고 분석했다.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때 대다수 CEO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자기 원칙과 판단에 따라 결정한다.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때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가’라는 질문에 61.3%가 자기의 원칙과 판단이라고 답했다.

CEO의 판단이 곧 마지막 결정이 되고, 책임감의 무게만큼 스트레스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CEO의 누적된 스트레스는 회사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작은 결정이 쌓여서 큰 결과를 만드는 것이 회사 조직이고, CEO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하루에도 수십 건씩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바이오스페이스 차기철 사장은 “신경질이 난 상태에서 결정한 것과 기분이 좋을 때 결정한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가 누적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아무래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신의 스트레스가 의사 결정에 부정적 혹은 (악)영향을 미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고 답한 CEO는 절반(48.4%)에도 미치지 못했다. ‘있다(24.7%)’ 또는 ‘모르겠다’(26.9%)고 답한 이가 더 많았다(표 참조). 정혜신씨는 “설령 ‘없다’고 답한 이라고 해도 스트레스가 의사 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
 
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받을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CEO는 많지 않았다. 정신과 상담을 받은 이는 3.2%에 불과했고,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도 8.6%였다. 정신과 상담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67.7%) 정신과 상담은 필요없다(23.7)고 단언한 이가 훨씬 많았다.    

그렇다면 CEO들은 스트레스를 어떤 방법으로 해소할까(표 참조)? CEO들은 주로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푼다(24.7%). 음주나 흡연을 즐기는 이도 많았고(20.4%), 다른 일에 몰두하는 ‘워커홀릭’도 적지 않았다(16.1%).

많은 CEO가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까닭은 본인들의 처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CEO들은 늘 시간에 쫓겨 산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불만스러운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설문에 CEO 절반 가량(49.5%)은 ‘내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응답했다. CEO 10명 가운데 9명(87.1%)은 자기 시간 가운데 70% 이상을 일에 투자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10~15%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위해 낼 수 있는 시간은 하루 한두 시간밖에 안 되고, 결국 그 안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운동 정도밖에 없다.

또 친구나 가족과 대화를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달리 운동은 언제든 혼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음주와 흡연’이 가장 이상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답한 제일모직 제진훈 사장은 “사람들이 가장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CEO는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친구나 가족과 술 마시며 수다 떠는 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사람들이다. CEO는 주어진 책임만큼 외롭고 고독해서 스트레스도 홀로 풀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제사장은 매일 헬스클럽에 가서 1시간30분씩 운동을 한다. 운동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피로감은 어느 정도 해소한다고 제사장은 덧붙였다.     

제진훈 사장처럼 대다수 CEO들은 본인이 선택한 방법이 스트레스 해소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자신이 하고 있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는 29%에 불과했다. 40.9%는 ‘그저 그렇다’, 30.1%는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다.

CEO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취미나 문화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CEO 10명 중 4명(39.8%)이 취미나 문화 생활을 즐기는 것이라고 답했다. 10명 중 2명 가량(24.7%)은 운동을 꼽았다. 정혜신씨는 “스트레스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되려면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취미나 문화 생활을 즐길 때, 또는 운동을 할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라고 귀띔했다.

CEO들의 스트레스 해소법  

제일모직 제진훈 사장(56)
 
비교적 화를 잘 내는 편이던 제진훈 사장이 스트레스 관리에 본격 돌입한 것은 2년 전이다. 황수관 박사의 강연을 들은 뒤 스트레스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부터 피트니스 클럽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무중 몰려오는 스트레스와 화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제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때면 숫자 세기에 몰입한다. 100부터 거꾸로 숫자를 세면서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보고서에서 맞춤법 틀리는 것은 용서해도 숫자 틀리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 ‘숫자 귀신’다운 발상이다. 제사장은 “화와 스트레스는 몸 안에 독을 만들고, 그 독은 다른 이에게도 전염되기 때문에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숫자 세기를 하면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화를 다스릴 수 있어 좋다”라고 말했다.

엔비디아코리아 한석호 사장(44).

 
그래픽 카드를 비롯한 디지털 미디어 프로세서 회사인 엔비디아코리아를 이끄는 한석호 사장은 ‘그 날의 스트레스는 그 날 푼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기가 죽고 일할 의욕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사장이 애용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보디빌딩과 등산이다.

한사장은 “조각하듯 몸을 만들고, 경기하듯 산에 오르다 보면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이것도 해냈는데, 그깟 일쯤이야…’ 하면서 의욕이 새로 생긴다”라고 말했다. 한사장에게는 운동도 일종의 도전 과제와 같다. 버거울 정도의 목표량을 날마다 정해놓고 조금씩 극복해 간다. 2007년에는 국제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할 예정이다.

삼진엘앤디 이경재 사장(61)

 
삼진엘앤디는 LCD 백라이트를 개발해 생산하는 코스닥 기업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분야이다 보니 최고경영자가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이경재 사장은 “기술 개발은 더디고 고객사들은 자꾸 재촉할 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 그럴 때는 도망가고 싶을 정도다”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사장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자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이사장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체조와 요가다. 아침마다 1시간씩 체조와 요가를 병행하면서 스트레스를 관리한다. 업무 시간 중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발생하면 사무실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체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바이오스페이스 차기철 사장(47)

 
‘가장 이상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답한 이는 차기철 사장 한 사람이다. 차사장은 “질문 그대로 이상적인 해소법에 대한 답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애할 때 아이디어와 기운이 가장 넘치지 않나.

그런 열정이야말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유부남이 쓸 수 없는 방법이지만…”이라고 설명했다. 현실 생활에서 차사장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음주와 흡연이다. 운동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때로는 운동마저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신다. 누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최고의 ‘약’은 직원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다. 차사장은 직원들이 ‘고맙다’고 할 때, ‘요즘 힘드시죠?’ 하면서 위로해줄 때 가장 기운이 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세방기업 이상웅 대표(47)

 
이상웅 대표의 스트레스 관리 비결은 가능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 오래 있던 직원이 나가서 투서를 넣고 협박하는 바람에 이대표는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배신감이 들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죽하면 저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대표는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화도 누그러지고 스트레스도 준다. 아무리 열 받아도 해결 방법을 찾는 데는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운동만으로도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해소된다고 이대표는 덧붙였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이대표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잡지를 뒤적이거나 그림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열렸던 뚜껑이 닫히고’ 차분한 마음으로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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