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저것도 <천자문>이야?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8.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의전당 ‘하늘천 따지’전/희귀자료 100여 종 한데 모은 서예 대잔치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하늘천 따지’전(8월16일~9월19일)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우선 <천자문>을 소재로 삼은 국내 최초의 전시다. 한자 붐을 타고 <천자문> 교재 수십종이 서점에 나와있는 현실에서 뜻밖이다.

또 하나. <천자문>을 뗐다는 이들도 처음 보았을 색다른 <천자문>의 세계가 펼쳐진다. 전시장에는 국내의 현존 <천자문> 책 중 가장 오래된 1475년 봉선사판 조맹부 <천자문>을 비롯해 조선시대와 일제 때 인쇄하거나 필사한, 글씨체뿐 아니라 내용까지 판이한 <천자문> 100여 종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하나 더. 국립 전시 기관이 전시회를 열 경우 논문을 첨부한 고급 도록이 함께 출간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판만 먼저 나오고 학술 논문은 나중에 따로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전문가들도 처음 본 자료가 많아 논문을 수정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따라서 전시 기간에 두 차례 열리는 학술토론회는 전시와 별도로 주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천자문>이라고 하면 ‘하늘 천 따 지’로 시작하는 것만 떠올린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문사였던 주흥사(周興嗣, ?∼521)가 지었다는 <천자문>이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갈리는 것으로 시작해 언재호야(焉哉乎也)라는 허사로 끝나는 2백50구의 사언고시다. 국내에는 백제 때 처음 전해졌다. 이후 안평대군·박팽년·이황·김인후·신위·조윤형 등 저명한 도학자들이 자신의 서체로 <천자문>을 적어서 남겼다. 그 중 석봉 한 호가 1583년 선조의 명을 받고 쓴 <천자문>이 가장 유명하다. 

친일파 <천자문>에 ‘대한제국 독립만세’

그러나 <천자문>이 꼭 이렇게만 씌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흥사 <천자문>의 형식만 빌려 다양한 <천자문>을 썼다. 도학의 핵심을 1천 자로 정리한 <성리(性理) 천자문>은 ‘일리태극, 이기음양’ 순으로 되어 있다. <역대 천자문>은 중국의 역사를 담은 것이고, 이에 맞서 우리 선조들은 <조선역대 천자문>을 썼다. 다산 정약용이 쓴 <아학편(兒學編)>도 일종의 <천자문>이다. 다산이 ‘학동들의 공부에 적절치 않은 일시적 희작’이라고 <천자문>을 호되게 비판한 뒤 초학자용 학습서로 쓴 책이 <아학편>이다.

근대 초는 대중 계몽기였다. 민족 교육의 상당 부분이 서당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다양한 <천자문>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어 주석이 달린 <천자문>, 그림을 곁들인 <천자문>도 있다. 서양 선교사가 편찬한 <유몽천자>(어린이를 계도한다는 뜻)는 세계사를 서술하고, 여기 등장하는 새로운 한자를 <천자문> 형식으로 정리한 교양 서적이다.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도 자신의 <천자문>을 썼다. 전향하기 전에 쓴 듯, 1천자 안에 ‘대한제국 독립만세’라는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국내에서 간행된 <천자문>에는 대부분 우리말 석문이 달려 있어서 국문학 연구의 귀한 자료로 이용된다. 가령 18세기에 편찬된 <주해 천자문>에는 ‘거칠 황(荒)’자에 ‘거칠다’와 ‘크다’는 두 가지 석음이 달려 있다. ‘황’자에 대한 용례가 늘었음을 뜻한다. 통영에서 편찬된 <천자문>은 서울에서 펴낸 <한석봉 천자문>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주머니 낭(囊)’자를 ‘줌치 낭’으로 달리 적었다. 이 책은 지방 사투리가 ‘교과서’에서도 쓰였음을 알려주는 주요 판본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었다. 

다양한 필사본들도 볼거리다. 못자리에 모를 심듯 단정하게 칸을 나누어 쓴 박팽년의 초서와, 글자와 글자가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흐르는 김인후의 초서를 비교하는 맛도 쏠쏠하다. 대부분의 필사본에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공부 방법을 전하는 내용 등 다양한 덧글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아 전통 시대 집안 교육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천자문>을 종합적이고 학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전시회 기간에 열리는 학술대회에는 서예 전문가와 국학자, 국문학자, 한문학자, 교육학자, 서지학자, 컴퓨터 폰트 연구자들이 모여 종합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천자문> 석음 연구의 권위자인 홍윤표 교수(연세대·국문학)는 “전문가인 나도 처음 본 자료가 많아 흥분된다. 전시기획자인 이동국 선생이 큰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텍스트 외에 <천자문>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도 향유할 수 있다. 서예박물관은 임방울·이화중선 등 20세기 초 명창들이 부른 <천자문 뒷풀이 노래> SP판을 최근 발굴해 전시 현장에서 들려줄 예정이다. 어린이 박물관 체험교실과 여울목무용단의 창작 공연도 열린다. 문의 02-580-1282.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