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구하기’ 방패 들었나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5.08.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X파일과 관련해 1997년 대선 자금 수사에 반대한다는 노대통령의 발언은 왜 나왔을까.그 배경과 파장을 짚어본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거사’를 알린 것은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명색이 임기 반환점을  기념해서 기자 1백80여명을 초청한 자리인데, 밥만 먹고 끝내기는 좀 그렇다는 취지였다. 대통령은 이미 메모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를 다시 대선 자금 문제로 조사하는 그런 수준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8월24일 노대통령의 발언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발언을 기자들에 주는 ‘선물’ 차원에서 불쑥 꺼낸 것은 아니었다. 참모들에 따르면, 노대통령은 이른바 X파일이 불거진 직후부터 이 문제의 처리 방향을 예의 주시했고, 적당한 시점이 되면 자신의 생각을 밝힐 계획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날 발언과 청와대 참모진의 설명을 종합하면, 노대통령이 1997년 대선 자금 수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법률적 판단이다. 1997년 대선 자금은 법적으로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 대상이 아닌데,  괜히 이 문제를 가지고 힘을 뺄 필요가 있느냐는 현실적 판단을 한 것이다. 노대통령은 문재인 민정수석 등 참모들과도 이런 문제 의식을 줄곧 공유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두 번째는, 대선 자금 문제는 이미 그 구조적 병폐가 드러날 만큼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사로 정리하고 가야 한다는 소신이다. 노대통령은 이날 “구조적·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일 경우 100가지 하면 다 나올 것을 가지고 1000가지 한다고 지지고 볶고 할 일이 아니다. 10개만 딱 조사해서 1000가지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수준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노대통령이 8월8일 X파일과 관련해 처음 입을 열면서 “정경 유착과 도청 문제 중 도청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이다. 정경 유착은 역사적으로 진상이 밝혀져 왔고, 구조적인 것이 다 알려졌다”라고 언급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대선 자금을 둘러싼 정경 유착의 진상은 5공 청문회를 시작으로 2002년 대선 자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역사적 도마에 올랐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또다시 과거를 헤집는 것은 국력 낭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청 문제의 경우 국가 권력이 개입했다는 죄질의 엄중함에다 아직 그 구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에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이 참모는 덧붙였다. 

세 번째는 정치 보복이라는 인상을 줄까 하는 우려다. 노대통령은 간담회 자리에서 “이회창 후보는 1997년 세풍 사건으로 조사 받았고, 지난번 2002년 대선 자금 수사 때도 조사를 받았는데, 또 조사하면 대통령인 내가 너무 야박해지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노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각종 과거사 정리를 놓고 ‘역사 청산을 명분으로 한 적대 세력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공격이 있는 터라 이를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조기숙 홍보수석은 “대통령 발언은 과거사 진상 규명이 누구를 혼내주고 보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우리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인 만큼 보복성 과거사 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호남 달래기’ ‘한나라당 구애’ 등 세 갈래 해석

하지만 노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즉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각종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보다 한술 더 뜰 정도로 적극적인 규명 의지를 밝혀왔던 그간의 노대통령 스타일과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만 해도 “국가 권력이 개

 
입한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를 배제해서라도 진상 규명과 피해자 구제를 철저히 해야 한다”라고 ‘과격한’ 발언을 한 터라, ‘공소시효가 끝났는데 뭘...’이라는 이번 노대통령의 유화적인 발언을 놓고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해석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물론 야권에서도 당장 “대통령이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월권이다”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노대통령의 ‘진의’를 놓고 ‘DJ와 호남 달래기’ ‘이회창 전 후보와 한나라당에 구애하기’ ‘삼성과 이건희 회장 감싸기’ 라는 다양한 ‘설’이 나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호남 달래기라고 보는 쪽에서는 국정원이 DJ 정부 시절의 불법 도·감청 사실을 고백하면서 불거진 전·현직 대통령 사이의 냉기류를 확실하게 해소해 보자는 차원이라는 해석에 무게를 싣는다. 국정원 발표와 DJ의 갑작스런 입원으로 가뜩이나 호남 민심이 술렁이는 상황에서 만에 하나 김 전대통령이 또다시 검찰에 불려다니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호남 민심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민노당 노회찬 의원을 비롯해 X파일 내용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촉구하는 진영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이 되기 전에 받은 정치 자금은 재임 기간 중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X파일이 암시하는 대로 만약 김 전대통령에게 전달된 삼성의 정치 자금이 기아차 인수에 도움을 주는 대가의 성격이라면 이는 뇌물죄에 해당해 공소시효가 더 늘어난다”라며 노대통령의 공소 시효 만료 주장을 반박했다.

이번 노대통령 발언이 이회창 전 후보와 한나라당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은 노대통령의 대연정 주장과 맞닿아 있다. 임기 후반기를 시작하면서 ‘국민 통합’ ‘지역주의 극복’을 명분으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노대통령 처지에서 보면 이회창 전 총재의 거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1백8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X파일 공동대책위원회는 X파일을 근거로 세풍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렇게 될 경우 이회창 전 후보측이 또다시 핵심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 이회창 전 후보와 한나라당은 “이미 두 번이나 당했기 때문에 더 나올 것이 없다. 뭔가 있는데 괜히 봐주는 척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검찰이 실제 세풍 재수사에 착수한다면 이회창 전 후보가 다시 한번 타격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DJ 달래기나, 이회창 감싸기보다 시민단체나 민노당이 더 강하게 혐의점을 두는 대목은, 노대통령이 실제로는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수사를 중지시키려고 한 것 아니냐는 점이다. 말로는 “김대중·이회창 두 전직 후보에 대한 수사를 반대한다”라고 했지만, 돈 받은 사람을 수사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돈 준 사람도 수사하지 말라는 얘기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노대통령 발언을 삼성 구하기라고 의심하는  쪽에서는 X파일 공개 후 노대통령이 고비 때마다 취했던 행보를 그 근거로 든다. 시발점은 7월2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의 발언이다. 7월21일 조선일보, 그 다음날 MBC 보도로 X파일 사건이 불거진 후 처음 대통령의 의중이 드러난 이 날 회의에서 노대통령은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국가기관의 불법 행위이다. 불법 도청으로 만들어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고심되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내용에 대한 수사 보다 불법 도청 행위에 무게를 싣는 발언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검찰과 법무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한 발짝 거리를 두었다.

8월5일 국정원이 DJ 정부 시절에도 불법 도·감청이 있었다는 자기 고백을 하면서, X파일 정국은 급속히 도청 수사 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노대통령은 8월8일 한마디 더 얹었다. “불법 도청 파문과 관련해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중 도청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이다”라고 기존 입장을 좀더 분명히한 것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1997년 대선 자금 수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라는 8월24일 발언까지 나왔다.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 가장 많은 시민단체가 연합하고, 민노당이 줄소송까지 감수하며 ‘삼성 수사’에 올인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마치 삼성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형세가 만들어진 것이다. 속 보이게도 <중앙일보>는 8월26일자 사설에서 이런 노대통령의 선택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노대통령과 달리 처음부터 불법 도청보다 X파일의 내용, 특히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불법 행위 쪽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민노당과 X파일 공대위가 보기에 이번 노대통령의 발언은 날벼락과 같다.  노회찬 의원이 떡값 검사의 실명을 밝히는 등 온갖 푸닥거리를 한 다음에야 이제 겨우 검찰이 세풍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는데, 대통령이 찬물을 쫙 끼얹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통령의 발언이 삼성의 불법 뇌물 공여 사건에 대한 엄정 수사를 기대하는 국민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라며 대통령에게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8월26일에도 청와대 앞에서는 X파일 공대위가 주관한 시위가 열렸다. 8월25일 보도된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X파일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을 수사해야 한다’는 응답이 59.2%로 ‘수사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36.4%) 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 ‘삼성 봐주기’ 논란에 대해 청와대측은 ‘노무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라며 펄쩍 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큰 원칙을 밝힌 것일 뿐, 검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도, 공소시효가 남은 사건을 수사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한 참모는 “솔직히 기아차 관련 부분이 뇌물죄가 적용되는지 여부 등 구체적인 대목까지 섬세하게 검토한 후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다. 대통령은 구조가 파악된 과거사는 이제 정리하고, 안 된 것에 집중하자는 뜻을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노대통령에게 흘러들어간 2002년 대선 자금이 밝혀질까 봐 삼성의 5백억원 채권 수사를 막으려는 것이다”라고 제기한 음모론에 대해서도 2002년 수사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라고 딱 잘랐다. 다만 익명을 요구한 한 핵심 참모는 “대선 자금은 대한민국 재벌이 모두 연루된 부정적 관행이었고 이로 인해 다들 단죄를 받았는데, X파일 때문에 삼성만 유독 다시 도마에 오르는 것이 다소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대통령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해, 대통령 심경의 일단을 가늠케 했다.

천정배 장관도 ‘말 바꾸기’로 곤욕

아무튼 진대제-홍석현으로 이어지는 삼성 인사들에 대한 요직 발탁, 조-중-동 보수 언론 연합에서 <중앙일보>의 탈퇴, 참여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으로 인해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끊이지 않던 노무현 대 삼성간의 밀월설에, 이번 노대통령 발언은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 노대통령 따라잡기에 바쁜 열린우리당과 여권 인사들은 곳곳에서 망가지고 있다. 이번 국면에서는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대통령 딸랑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검찰이 X파일 수사를 제대로 못한다면 법에 따라 지휘권을 행사할 용의도 있다”라고 했던 천장관이 노대통령 발언 직후 “1997년 대선 후보 조사는 범죄 요건이 안 되기 때문에 수사를 할 수도 없다”라고 말을 바꾸자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독설을 날린 것이다. 천장관이 부랴부랴 “대통령이 대선 자금과 관련된 모든 범죄행위를 다 수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적법한 수사 단서가 있다면 수사하겠다”라고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신뢰도에 금이 간 후였다.
‘수사 반대’ 발언으로 한바탕 여론을 뒤흔든 노대통령은 8월26일 텔레비전 <국민과의 대화>에 나와 또 한번 국민들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지지도 29% 대통령으로서의 불우함을 호소하면서,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충격 발언을 한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과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일 사이에 점점 더 괴리가 생기고 있다.

 
문제다. 시효가 완성됐다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정리를 해둬야 되고, 공개하고 정리해 두어야 될 사건이 많이 있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조사할 수 있는, 합법적으로 강제 수사까지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2005년 8월18일 언론사 정치부장단 간담회)

“테이프 안에 들어 있을 과거 구시대의 악습들, 정경유착을 비롯한 구조적인 악습들 그건 이미 도청보다 훨씬 더 많이 밝혀졌다. 그 구조는 많은 것이 밝혀져 있고, 개별적 사실들도 많이 밝혀졌는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도, 어떻든 간에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진상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공개할 것이냐?’에 관해서는 대단히 신중한 판단을 거쳐서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수사할 것은 수사하고 이렇게 처리하게 될 텐데, 이 전과정에서 이것도 역시 과거사 정리의 한 과정으로 우리가 봐야 된다.”(2005년 8월9일 국무회의 간담회)

“도청 테이프 안에 담긴 내용에는 범죄 사실도 있고, 범죄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정리하고 넘어가야 될 일도 있고, 보호해야 할 사생활도 있고 그런 게 뒤엉켜 있다고 생각한다. 수사할 것은 다 수사할 것이라고 본다. 누가 수사 안 한다고 한 사람이 있나? 순서의 선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사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 문제는 법무부와 검찰을 믿고 있다.”(2005년 8월8일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

“X파일을 덮으려고 한다고 하는데, X파일이 나와 있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곤란한 것이 무엇이 있으며, 또 덮어서 이득 볼 것이 무엇이 있나? 아무 것도 없다. 진실만이 답이다, 진실만이 내편이다, 아마 내가 그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 대통령 자리 그냥 있지도 못할 것이다. X파일 진실대로 갈 것이다.”(2005년 7월29일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