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억 채권’ 자물쇠 이제 막 열었는데…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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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삼성 수사에 부담감…“일단은 원칙대로”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8월24일 “1997년 대선 후보들을 조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발언한 데 대해 검찰의 분위기는 미묘하다. 겉으로는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 주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반적인 예측과 달리 검찰 수사가 더 가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대검 관계자는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노코멘트하겠다고 말했다. 뭐라고 답변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내심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한 말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검찰 내부에는 복합적인 반응이 혼재되어 있다. 현재 서울중앙지검은 X파일을, 대검 중수부는 2002년 대선 자금과 관련된 5백억원대 삼성 채권의 행방을 수사하고 있다.

X파일 수사와 관련해 그 동안 시민단체들은 줄곧 ‘이건희 회장을 조사하고 구속하라’고 요구했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대통령의 이번 발언으로 이회장을 조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1997년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의혹이 있는 김대중·이회창 후보를 조사하지 말라고 딱 부러지게 언급한 마당에 돈을 주었다는 쪽을 검찰이 조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비밀 열쇠 쥔 전 삼성증권 직원 최근 입국

검찰은 1997년에 불거졌던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 관련 기록을 재검토하며 수사에 의욕을 보이던 상황이었다. 삼성측이 여야 후보들에게 돈을 준 사실이 드러났지만 삼성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 다시 검찰 수사가 진행될 경우 삼성이 목표가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검찰 소식통은 “그렇잖아도 도청 내용을 수사하지 않는 한 이회장을 소환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던 검찰로서는 대통령의 발언을 내심 반기면서도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통령 말에 따라 검찰이 미온적으로 수사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X파일 수사도 수사지만 최근 검찰 안팎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검 중수부의 수사다. 2002년 대선 자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삼성 채권 5백억원의 행방이 밝혀질 경우 큰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정가와 검찰 주변에서는 이 채권 일부가 현 여권에 흘러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삼성이 당시 발행한 전체 채권 8백억원 가운데 3백억원이 이회창 후보 캠프에 흘러간 반면, 노무현 후보 캠프에는 15억원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노대통령의 측근인 강금원·안희정 씨를 통해 삼성 돈이 노후보측에 건너간 사실을 확인한 뒤, 채권 일련번호를 알고 있는 최 아무개씨가 해외로 도피해 더 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며 수사를 중단했다.

중수부가 이 사건에 다시 칼을 댄 이유는 대선 자금 수사가 한창이던 2004년 1월 급히 미국으로 출국한 전 삼성증권 직원 최 아무개씨가 지난 5월20일 비밀리에 귀국했기 때문이다. 내사 중지 상태여서 ‘입국시 통보’ 대상이었던 최씨는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검찰은 최씨 가족을 설득하는 등 온갖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씨는 입국한 사흘 뒤 출국금지 되었다. 그러나 최씨가 입국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수사가 본격화한 것은 최근으로 알려져 검찰이 적극 수사하려는 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최씨 입국과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는 ‘삼성 관련설’이 파다하다. 뚜렷하게 사실로 드러난 바는 없지만 출국에서 입국까지 삼성이 그의 뒤를 봐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삼성그룹 구조본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삼성 채권을 할인하는 일을 전담했던 그가 수사가 본격화하는 시점에 돌연 출국했던 점, 귀국 시점이 대선 자금 문제를 총괄했던 이학수 삼성 부회장이 사면된 직후라는 점 등이 근거로 거론된다.

입국하지 않았으면 장기 미제 사건이 될 수 있었는데 왜 최씨가 귀국해서 다시 사건을 키웠는지는 미스터리다. 검찰 주변에서는 최씨가 여야 정치권에 불법 대선 자금 3백80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이학수 부회장이 사면되자 귀국해도 되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경찰의 한 정보 전문가는 “그렇게 허술하게 판단했을 리 없다. 삼성측이 그가 귀국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며 다른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백억원대 채권의 행방을 밝힐 실마리는 7월19일 있었던 증권예탁원에 대한 압수 수색 결과가 1차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5천개에 이르는 채권 일련번호를 확인하는 작업이 마무리되는 9월 초쯤이면 결과가 드러날 전망이다. 여기서 일부라도 채권을 현금화한 사실이 밝혀지고 당사자 신원이 파악된다면 수사는 급물살을 탈 것이다.

최씨 신병 확보 못하면 수사 장기화 가능성

그러나 만약 여기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최씨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수사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액면가가 1천만원과 5백만원인 이들 채권의 만기일이 2007년 11월이고, 최 아무개씨의 상사였던 삼성 구조본 상무 박 아무개씨가 지난 7월 사망했기 때문이다. 검찰 처지에서는 대통령의 발언이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부분에 대한 수사에 진력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다.

검찰 관계자들은 삼성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수사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치밀하게 법적인 대응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누가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발언 이후 이건희 회장을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 흐름이 어떻게 될지는 검찰 수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가 지난 8월25일 보도한 전국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59.2%)이 조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36.4%)보다 훨씬 높았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대통령 발언은 삼성을 수사하지 말라는 수사 지휘다. 대통령 발언으로 가장 수혜를 본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라고 한 것은 앞으로 검찰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압박이 더 강해질 것임을 예상케 한다. 검찰 내부에서도 ‘원칙론’을 내세워 삼성 사건 수사를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흐름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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