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정’ 죽이러 호랑이 굴로 간다?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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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 대통령과의 단독 회담에 왜 응했나
 
“연정 등 정치 이슈에 대해서는 토론에 일절 응하지 않기로 했는데 며칠 전부터 구멍이 뚫리고 있다.” 지난 9월2일 고흥길 한나라당 홍보위원장이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한 말이다. 한 달 반 전에 그가 연정 관련 정치 토론에는 나가지 말라고 단속했는데, 9월1일만 해도 아침에 이종구 의원이, 밤에 김문수 의원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처럼 그동안 한나라당은 연정에 대해서는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했다. 8월 말에 열린 의원연찬회에서도 당 지도부는 무대응 전략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난 9월1일 박근혜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단독 회담을 수락한 것은 깜짝 뉴스였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연정에 무대응하기로 하고 대표가 이를 깼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박근혜 대표가 회담을 수락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정면승부론. 대통령이 줄기차게 연정을 제기하는데 이를 피하기만 하면 ‘반 개혁, 무 대책’으로 비칠 수 있으니 여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연정론에 선을 그으며 정면 승부를 벌이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위상 강화론이다. 대통령과 국정을 논의하는 카운터 파트너로서 정치적 위상을 드러내면서 당내 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 한나라당의 다른 주자와 차별화하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효과도 있다. 한나라당 주류측의 한 관계자는 “민생·경제에 대한 여론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경제를 외면하고 지역 구도 문제에 집착하는 대통령과 민생·경제를 챙기는 박근혜 대표 구도로 차별화하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다른 관계자는 ‘고육지책’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큰 틀에서 ‘차별화론’에 가깝다. 그는 “대통령이 단독으로 만나자는데 거부할 명분이 없다. 게다가 요즘 이명박 시장에게 여론에서 밀리는 기색이 있다. 끌려가느니 확실히 차별화하자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진작 ‘동상이몽’ 회담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런 이유다.

당내 논의 물꼬 틔우는 계기 될 수도

하지만 단독 회담에 정치적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절 의사를 명확히 밝히는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연정·선거구제 논의에 물꼬가 터지는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헌론’이 의원들 각개약진 형태로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표와 각을 세우는 한나라당 소장파 사이에서는 ‘대응책을 마련하고, 개헌을 논의해볼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이가 많다. 한 소장파 의원은 “연찬회를 시작으로 물꼬가 터졌다. 여권에서 대정부질문, 상임위에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다. 연정·개헌 등 논의가 확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개헌 논의가 불거져 나올 경우, 당내 내각제론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도 관건이다. 다선 중진 의원, 호남의 원외 위원장급이나 지난 선거에 낙선한 거물급 정치인들은 내각제에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내 영남 보수파를 대변하는 이방호 의원은 “연정은 일고할 가치도 없고, 개헌은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일부가 내각제를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과 연정론에 대한 수위를 높여 가자 한나라당내 혁신안 논의도 영향을 받는 분위기다. 당초 치열한 논란이 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혁신안이 외부의 메가톤급 이슈를 만나면서 ‘소소한 이슈’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혁신안을 지지하는 한 소장파 의원은 “연정·개헌 이슈 때문에 혁신안 문제가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낮아졌다. 혁신안은 물건너간 것 같다”라며 아쉬워했다.

다른 한나라당 의원은 9월 정기국회 양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어차피 정치판을 흔들자는 마당인데, 여야가 특정 법안을 갖고 국회에서 몸싸움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여권이 대연정을 제안한 마당에 몸싸움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지금 분위기라면 국가보안법이나 사학법 등 민감한 법안은 ‘논의 정도만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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