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를 지킨 사람들 1- 전형필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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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식민지 치하에서, 때로는 전쟁의 포탄 속에서, 때로는 혼이 없는 동족의 손에 의해 이 땅의 숱한 문화재들이 사라졌다. 산하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절터 그 구석구석에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이 있었을까. 일본 곳곳에 존재하는 그 많은 우리 문화재들, 미국을 비롯한 외국 박물관에 있는 그 문화재들은 어떻게 바다를 건넜을까. 눈물로 반도를 등졌을 그 문화재들은 지난했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산 증인들과 같다.

그나마 우리를 위안케 하는 것은 그 와중에도 국보를 지키는 데 헌신한 선각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때로는 전 재산을 털어, 때로는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때로는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귀중한 문화재들을 지켜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 석자를 오늘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부자들이 많이 산다. 삼청터널을 지나 정릉으로 이어지는 2차로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 경비 초소가 보이고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고급 주택들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재벌 회장들도 많이 살고, 외국 대사관도 많다.

내게 성북동은 간송미술관으로 기억된다. 심우장(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곳) 건너편에 있는 간송미술관은 낡았다. 한남동에 삼성이 만든 리움미술관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세 명이 설계한 리움의 그 고급스러움과 풀풀 나는 돈냄새에 비해 간송미술관은 어찌 보면 초라해 보인다. 학교 교문 같은 입구, 여늬 집과 다르지 않은 정원, 어린 시절 학교 창문을 연상케 하는 전시실의 문들 그리고 전시장이래야 기껏 그리 넓지 않은 2,3층이 전부라니-.

 
그러나 간송미술관이 다른 미술관들을 압도하는 것은 그 정신의 위대함 때문이다. 간송 전형필, 바로 그의 정신이 오늘도 살아 숨쉬는 곳인 까닭이다. 1991년 그의 30주기를 맞아 간송미술관이 펴낸 '간송문화' 기념호에서 미술사학계의 원로인 진홍섭 선생은 "해가 갈수록 선생의 뜻이 새로워진다"고 회상했다. 삼불 김원룡 선생은 "한 개인이 이룩한 우리 문화재 보존의 위대한 기념비로서 간송미술관의 새 건물을 나라에서라도 크게 세워서 간송의 큰 뜻을 널리 알려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간송은 1906년 7월 지금의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수만석 부자 집안의 막내 손자였다.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였던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만나면서 민족 문화재에 눈뜨기 시작한 간송은  일본 조도전대학에 유학할 때 <근역서화징>을 쓴 위창 오세창을 만나면서 인생의 행로를 정했다. 23세의 청년 간송이 43세의 장년 화가 고희동을 따라 65세의 대가 오세창을 만난 것이다. 간송은 이후 오세창에게서 고증학을 익히고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집안에는 불운이 이어져 이 시기 간송은 생가와 양가에 남은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상주의 몸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25세 나이(1930년)에 십만석 재산을 가진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1934년 북단장(지금의 간송미술관·선잠단 부근에 있다고 해서 오세창이 지은 이름)을 개설하고 나서부터 간송은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조선미술구락부 등 조선과 일본의 각 경매장에서 최고급품을 경매로 구입했다. 간송이 일본에 흘러가 있던 대규모 우리 문화재를 구입한 데는 행운이 따랐다.

존 개츠비라는 영국 변호사가 일본에 있으면서 수집해 놓은 최고급 고려청자를 비롯한 문화재들을 간송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간송의 남다른 열정과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있었다. 1937년 2월의 일이었다. 이때 간송이 확보한 문화재가 국보 65호 청자기린형향로, 국보 66호 청자상감연지연행문정병, 국보 74호 청자압형연적 등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서화전적과 함께 최대의 문화재 수집가가 되었다. 당시 간송은 공주에 있던 5천석지기 전답을 모두 팔아 이 문화재들을 샀다. 만약 간송이 이 문화재들을 개츠비로부터 사들이지 못했다면 전부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당시 간송의 나이 32세였다.

일본인 부자 상인의 손에 넘어 가서 세상에 보물 중의 보물로 널리 알려져 그 값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蕙園傳神帖>(국보 135호)을 손에 넣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공력을 들인 끝에 되사온 것, 고려상감청자를 대표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을 당시 기와집 수십채 값을 주고 일본인으로부터 사들인 것, 큰 기와집 한 채가 1천원 할 때 1만1천원을 주고 <훈민정음> 원본(국보 70호)을 사들인 것, <동국정운> (국보71호)을 사들인 것 등은 우리의 유일무이한 문화재를 일제의 손으로부터 지켜낸 자랑스런 쾌거였다. 이밖에도 간송과 관련한 전설 같은 문화재 비화는  이루 다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전쟁으로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였을 때 간송의 수집품도 하마터면 북송당할 뻔했다. 그러나 소전 손재형과 혜곡 최순우의 재치로 위기를 넘겼다. 두 사람은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 하면서 시간을 끌어 서울이 다시 수복될 때까지 문화재를 옮기는 것을 저지했다. 그들은 인민군 책임자에게 위스키를 권하면서 일본 판화로 된 춘화를 보여주면서 힘든 나날을 이어갔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간송의 문화재들은 위기를 넘겨 부산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 문화재는 김승현 박사가 빌어 쓰던 영주동 가자마 별장에 보관되어 간송의 차남 경우가 지켰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것은 서울이 수복된 뒤 간송이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이들 문화재를 다시 서울로 옮겨온 지 10일만에 별장에 불이 나 완전히 타버렸다는 것이다. 만약 간송의 문화재가 그대로 이 별장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내려앉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가 모두 다 이렇게 잘 관리되었던 것은 아니다. 워낙 경황이 없던 터라 중요한 문화재만 정리해 피난하다 보니 각종 전적류나 서화류들은 그대로 남겨둔 것이 많았다. 이런 것들이 전쟁 통에 어떤 경로를 통해 시중에 쏟아져 나왔다. 간송은 "3년 동안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궁이 앞에는 당나라에서 펴낸 귀한 책들이 불쏘시개감으로 쌓여 있고, 사방벽과 뚫어진 창문에는 고활자문과 내각판으로 도배를 했다. 청계천변 노점에서도 내 장서가 나타나고 고물상 탁자에도 내 애장본이 꽂히었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간송은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이들 문화재들을 다시 사들인다.

이후에도 잡지 <고고미술>을 창간하는 등 자나깨나 우리 문화재를 애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간송은 1962년 1월26일 급성 견맹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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