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의 임계치에 도전하다
  • 김형석 (월간 <스크린> 기자) ()
  • 승인 2005.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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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조폭영화:<가문의 위기>

 
최고 육질의 안심살이라도 적당한 소스와 양념이 없다면 무미건조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광어회가 아무리 싱싱해도 딸린 반찬과 매운탕이 없으면 풀코스를 이룰 수 없으며, 잘 익은 떡국도 고명 없으면 왠지 심심하다. 영화도 다를 바 없다. 유머 감각 없는 액션, 스펙터클 없는 멜로, 깜짝 카메오 없는 코미디, 컴퓨터그래픽 없는 SF….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순도 100% 장르 영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근 영화는 대부분 ‘장르 혼합’ 경향을 띤다. 하지만 단지 섞는 것만으로는 조금은 퍽퍽하다. 흥행을 위해서는, 마케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한 ‘양념’은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황금 비율로 섞였을 때 가장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 영화에서 통용되는 양념? 먼저 카메오를 들 수 있다. 우정 출연, 특별 출연, 찬조 출연, 어떨 땐 ‘의리 출연’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들은 개봉 막바지 홍보전에서 효자 노릇을 한다. 패러디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젠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기까지 한 패러디는 ‘모방은 흥행의 어머니’라는 나름의 격언을 신봉한다. 섹스 코드와 화장실 유머는 하나의 세트를 이룰 때가 많은데, <색즉시공>을 생각하시면 대강 감 잡으실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인상적인 삽입곡, 영화 속 영화, 생뚱한 판타지, 질펀한 욕설, 유치찬란한 컨셉트와 설정, 복고주의 아이템 등 최근 한국 영화는 원재료의 신선도 유지보다는 양념의 가짓수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관객들의 입맛 또한 바뀌어서 ‘양념적 요소’가 빠진 영화는 ‘왠지 모르게 싱겁다’고 품평한다.

한국형 코미디 영화의 기본 코드는 혼성모방

그런데 최근에는, 양념으로만 맛을 낸 ‘양념 과다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적게 쓰면 맛이 나느냐’며 영화에 조미료를 팍팍 치기 시작했던 시기를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대략 2000년 즈음에 닿는다. 물론 이전에도 신승수 감독이라는 걸출한 주방장이 있기는 했다. 그는 박중훈이 개인기의 끝을 보여주었던 <할렐루야>(1997년)에서 카메오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고, 임창정이 북 치고 장구 쳤던 <엑스트라>(1998년)에서 업그레이드한 바 있다. 이젠 컬트로 추앙(?)받는 이경규의 <복수혈전>(1992년)은 한국의 ‘모던 카메오 무비’의 원조 격일 것이다.

양념 과다 영화의 핵심은 캐스팅이다. 수많은 개그맨과 가수와 엔터테이너들이 영화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으며, 코미디를 넘어서 멜로와 액션 그리고 호러까지 좀더 튀는 캐스팅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들을 판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제목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관용구적인 느낌’은 ‘영화적 양념’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트로트 제목(<목포는 항구다>), 옛날 참고서 이름(<영어 완전 정복>), 사자성어(<색즉시공>),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가문의 영광>), 박통 시대에 대한 향수(<긴급조치 19호>) 같은 제목의 영화들이 양념 과다 영화였다. 특히 <긴급조치 19호>(2002년)는 캐스팅의 대부분을 가수로 채우는 호연지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양념이라는 요소를 노골적으로 흥행을 노리는 얄팍한 상술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된다. <3인조>(1997년)에서 양념이 과했다고 생각했던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부터 양념의 깊은 맛을 내는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복수 3부작’은 그의 ‘양념 연구 3부작’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한국 영화에서 <친절한 금자씨>(2005년)처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찾기 힘들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2001년) 또한 건설적인 사례이다. 곽재용 감독은 8년 동안 숙성시킨 양념 맛을 이 영화에서 선보였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일우가 1인5역을 맡은 ‘독수리 5형제’는 압권이다.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될 점 하나가 있다. 장 진 감독의 독특한 코미디는 양념적 요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재료 자체가 이미 독특한 풍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념 과다 영화와 조폭 코미디는 쌍생아

하지만 양념 과다 영화의 본류는 조폭 코미디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최근작 중 가장 양념이 돋보이는 영화는 <가문의 영광>(2002년) 속편인 <가문의 위기>(2005년)다. 전편이 조폭 영화의 우직함에 순애보를 섞었다면, 후편은 치사량을 넘지 않을 정도의 양념을 가미한다. 김원희 신현준을 투톱으로, 김수미 탁재훈 정준하 신 이 공형진 등의 조연진과 현 영이나 박희진 같은 카메오가 이루어내는 라인업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서 날고 기는 일당백의 용사들이다. 무식함과 유치함을 내세우는 조폭 코미디 특유의 유머가 난무한다.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드는 이 영화의 과다한 양념이 용서받을 수 있는 지점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발군의 코미디 연기다. 김수미가 신현준을 째려보며 간결하면서도 나지막하게 내뱉는 욕 한마디만 제대로 듣는다면, 당신은 최근 한국 영화가 보여준 최고의 ‘코믹 뉘앙스'를 즐기는 셈이 될 것이다.

올 추석 극장가는 ‘조폭 코미디’ 계보를 잇는 <가문의 위기>와 허진호식 멜로의 정점을 보여주는 <외출>, 그리고 한국형 느와르 개척자 이명세 감독의 무협 사극 <형사 Dualist>가 삼파전을 펼친다. 관객이 택할 것이 과연 웃음일지 울음일지, 아니면 스릴일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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