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도이모이’ 고삐 쥔 베트남
  • 정나원 통신원 ()
  • 승인 2005.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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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가입 위해 10년째 고군분투…최대 적은 쌍무협상 앞둔 미국


 
올해로 베트남은 독립 선언 60주년에 종전 30주년을 맞았다. 개혁·개방을 실시한 지도 어느덧 20년에 가깝고, 그 사이 연평균 6%대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 하지만 올해도 베트남 정부는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1995년 창립)에 가입하기 위해 10년째 고군 분투 중이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려면 세계무역기구 본부에서 진행되는 다자 협상 이전에, 기존 회원국들과 개별적으로 쌍무 협상을 먼저 거쳐야만 한다. 문제는 ‘WTO 플러스’라 불리는 이 쌍무 협상이다. 기존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 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신청국에 각양각색의 양보를 요구하기 마련이며,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가입이 지연되거나 어려워진다. 베트남의 현 실정을 두고 유엔개발계획(UNDP) 베트남 사무소의 수석경제자문은, ‘100명과 동시에 체스 게임을 벌이는 격’ 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WTO 가입은 시장 경제 완성의 도약판

베트남은 이와 동시에 국내적으로도 시장·기업·투자·금융·농업·지적재산권 등 경제 행위를 규율하는 제반 법제들을 세계무역기구 규범에 맞게 고치느라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베트남이 올해 말을 목표로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서두르는 까닭은, 3년 전 비회원국이라는 이유로 쓰라린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명 ‘메기(catfish) 사건’이다. 1990년대 말만 해도, 베트남이 미국에 수출하는 메기 양은  약 9백t에 머물렀다. 한데 2001년 미국과 무역 관계가 정상화한 직후, 2002년의 수출 물량이 무려 7천6백여 t으로 수직 상승해 시장 점유율이 12%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자 미국 어업협회가 들고 일어나 “북미 해역에서 잡히는 메기만 메기일 뿐, 메콩 델타의  메기는 메기의 사촌뻘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편 끝에, 수입 관세 64% 부과를 요구하며 반덤핑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 메기 분쟁에 대해서는 당시 미국 경제 전문가들조차 미국의 파렴치한 보호 무역주의에 다름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베트남은 이 분쟁을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자격이 없었고, 메콩 델타의 가난한 어부들은 소송을 맡아줄 변호사를 댈 형편이 못되었다.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지 않는 한 베트남은 주요 수출 품목인 의류·신발에서도 이 같은 억울한 경우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지난 7월 유럽연합이 베트남의 신발 수출에 반덤핑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무역 분쟁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따른 여러 이점 가운데 하나다. 저개발국인 베트남에게 최대의 이점은 외국 자본·시장·기술에 접근하기가 쉬워진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중국이다. 2000년 중국에 대한 해외 투자액은 약 4백억 달러였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직후 2002년 해외 자본이 중국에 투자한 돈은 5백30억 달러로 급증했다.
 
베트남의 경우도 외자 기업 부문이 국내총생산의 10%, 전체 수출 규모의 21%(2002년 기준)를 차지할 만큼 베트남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는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시장 경제 개혁의 완성을 통한 경제성장의 획기적 도약판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 사회 전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1986년 이른바 ‘도이모이’라는 이름으로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래,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마이 페이스’로 경제 개혁을 추진해왔다. 정치·사회 불안정을 최소화하며 경제성장의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세계무역기구 회원국들이 정하는 속도와 규칙에 따라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미국 끈질기게 “개방 시기 앞당겨라” 요구

한 예로 베트남은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으로부터 국영 기업 개혁 속도가 중국에 비해 너무 느리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지금까지도 베트남에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잔존물인 국영 기업이 약 5천5백여 개에 이른다. 베트남 정부가 꾸준히 민영화 작업을 추진해 왔지만, 개혁 과정에서 발생할 노동자 대량 실직이라는 사회적 부담과 경제적 효율성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베트남은 여전히 압도적인 농업 국가이다. 전체 인구의 약 80%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그 중 45%가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수입 농산품에 대한 관세율 인하는 국민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위험이 있다. 국제 비정부기구(NGO) 중 하나인 옥스팜의 2004년 말 보고서는, 현재 베트남이 기존 회원국에 제시한 관세율(27%)이 다른 동남아 회원국인 인도네시아(48%), 태국(35%), 필리핀(34%)보다 현저히 낮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지난 9월 중순까지 베트남은 주요 협상 대상 27개국 가운데 21개국과 쌍무 협상을 마쳤다. 남은 6개국 가운데 최대 장애물은 미국이다. 지난 6월, 1975년 종전 이래 처음으로  베트남 총리가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방문 기간에 판반카이 총리는 미국 보잉 여객기 구매를 발표하는 등, 세계무역기구 가입 문제와 관련해 미국 정·재계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베트남측은 전면 개방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특정 산업 부문 개방 시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제시해놓은 상태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이 ‘시장 경제 국가’임을 증명하는 데 너무 긴 시간이라며 개방 시기를 앞당기라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도 쉽게 물러설 태세는 아니다. 1945년 이래로 수십 년 동안 주권 국가로서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국민대다수에게 ‘부채’를 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오른 제2의 도이모이 불길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베트남에는 아직, 그 흔한 맥도널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앞둔 베트남에 맥도널드 진출은 시간 문제다. 이에 베트남 음식의 대명사인 쌀국수(퍼)로 응전 태세를 갖추는 데가 있다. 베트남 최초의 프랜차이즈 쌀국수집 ‘퍼24’이다. 
 
 베트남 국수는 대개 길거리에서 먹기 마련이다. 창업자 리뀌쭝(39세)도 늘 길모퉁이에서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곤 했다. 한데 개혁·개방 이후 급증한 오토바이의 매연과 소음 탓에 입맛을 잃기 일쑤였다. 좀더 위생적이고 편하게, 좀더 ‘모던하게’ 즐길 수는 없을까. 

그 때 리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맥도널드였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여행길에 맥도널드의 기업 운영을 눈여겨보아둔 터였다. 
      
리 씨의 단순한 착안은 2003년 4월 호치민 시에 1호점을 내면서 현실화했다. 그 후 2년 사이 전국적으로 14호점까지 늘었고, 자카르타에까지 진출했다. 2개월에 하나꼴로 늘어난 셈이다. 1997년 베트남에 들어온 KFC가 8년 동안 분점을 겨우 10개 낸 데 비하면 기록적인 성공이다.

2년 만에 14호점…KFC는 8년 동안 10호점

리 씨는 자신이 성공한 비결을 오히려 맥도널드와의 차이점에서 찾는다. 우선 맥도널드는 패스트푸드점이다. ‘퍼24’는 베트남의 전통 음식을 고스란히 살려낸 슬로푸드점이다. 스물네 가지 재료를 넣는 요리법으로 공식화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퍼24’는 그 요리법을 지칭한다.

기업 운영 방식에서도 차별성을 드러낸다. 경제 효율성이 떨어지면 고용 감소를 우선시하는 미국식 대신, 퍼24는 ‘공동체형’ 동료 관계를 유지한다. 현재 리 씨는 종업원을 8백여 명 두고 있다.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들이다. 리씨는 이들의 실수를 해고의 구실로 이용하기보다는 오히려 훈련의 기회로 삼게 한다. 효율성보다 종업원들의 근로 조건 향상과 가족적인 동료 관계를 제1 원칙으로 삼는다. 덕분에 퍼24를 훌쩍 떠나는 이들이 없다. 리 씨는 그들에게 웨이터에서 체인점의 매니저가 되는 꿈을 심어준다. 

이는 리 씨가 걸어온 길과도 무관하지 않다. 개방 이전에 그 역시 쌀국수 한 그릇도 못 먹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국영 호텔에서 4년간 급사 노릇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서비스업을 공부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던 1990년대 초반. 베트남에서 자비 유학생은 리씨가 처음이었다. 그는 유학 시절 5년을 다시 바텐더로 일하며 버텼다. 그 보상은 귀국해 홍콩 조인트벤처호텔의 매니저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외자 기업에서 일하는 동안 리 씨는 좀더 도전적인 목표를 세웠다. 이제는 베트남도 세계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골목길의 허름한 쌀국수집을 소박하면서도 모던한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변모시킨 동력은 여기에 있었다.

최근 리 씨는 정부의 프랜차이즈 기업법 개정에도 조언을 보태고 있다. 맥도널드·피자헛·스타벅스가 베트남 문전에 와 있는데, 실전 경험이 있는 이는 그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 쌀국수와 맥도널드 햄버거, 이제 곧 치열한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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