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한국, 누가 움직이는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10.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이 창간 16주년을 기념해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영향력 조사에서 관례대로 노대통령이 1위를 차지했지만 지목률은 떨어졌다.

 
그는 이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까. 결과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까, 아니면 숫자와 현실의 괴리를 뼈저리게 아파할까.

위에서 ‘그’라는 인칭대명사로 호칭한 인물은 대한민국 대통령, 구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올해로 열네 번째인 이 조사에서 대한민국 영향력 1위 인물은, 한번을 제외하곤 늘 현직 대통령이었다(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에 3등을 했다). 그래서 조사는 대개 누가 가장 영향력이 큰가보다 대통령의 힘은 얼마나 부침을 겪고 있는지 재어보는 바로미터 구실을 하곤 했다.

이런 현상이 유난히 역동적인 한국 정치의 특성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선대 대통령들과 비교해 보아도 부침이 더 심하다. 현재 그에 대한 지지율은 20%대에 머물러 있고, 제시한 정책들은 여론으로부터 비토를 받기 일쑤다. 정권의 물리적 수명에서도 내리막길로 접어든 올해, 그의 ‘힘’은 어느 정도나 인정받고 있을까.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 편집국의 관심은 이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여론과 밀월을 즐길 때조차 곁을 쉽게 내주지 않던 전문가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아닌가. 

뚜껑을 열고 보니 1등은 역시 그였다. 각계 전문가 1000명 가운데 674명(67.4%)이 노무현 대통령이 아직까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의 응답은 그들이 일반 국민보다 훨씬 보수적이거나 제도적 가치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현직의 프리미엄은 권력을 넘기는 순간까지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지닌 힘의 순도가 예년보다 약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해에 그를 ‘넘버원’으로 인정한 전문가 숫자는 75.7%. 1년 사이에 80여명(8.3%) 정도가 줄어들었다.  

종교인·사회활동가, 노대통령에 박한 점수

수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언론인(85%) 정치인(80%) 행정관료(76%) 들이 노대통령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했다. 반면 종교인(51%) 문화예술인(59%) 사회단체 활동가(59%) 법조인(63%) 들의 평가는 짰다. 기업인(68%)·금융인(68%) 들에게서는 딱 평균치만큼의 응답이 나왔다.

이런 수치가 표면상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서 분석해보면 조금 심각해진다. 언론인이나 정치인, 행정관료의 특징은 대통령 주변에서 권력의 리얼리티를 체감하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현실 역학관계를 아는 이들이 대통령의 힘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교수나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지목률은 지난해에 비해 거의 20% 포인트 씩 떨어졌다. 이들은 지난해까지 노대통령의 영향력을 가장 높게 평가한 집단에서 올해는 가장 박한 집단으로 바뀌었다. 특히 조사에 참가한 종교인들은 2명 중 1명꼴로만 노대통령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지목했다. 이 조사는 주관식으로 세 사람까지 복수 응답을 허용한다. 그런데 노대통령은 절반 가까운 종교인들에게 아예 영향력 있는 세 사람 중에도 끼지 못한 것이다. 과거의 지지자들에게, 또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들에게 노대통령의 존재감이 잊혀가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지지율 하락과는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일 것이다.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손잡고 실시한 2005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역시 정치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영향력 있는 인물 10걸 중에서 정치인이 무려 7명을 차지했다. 대통령과 떠오르는 차기 대선 주자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황우석 교수가 이런 틈을 비집고 5위에 오른 것은 올해 조사의 수확 중 하나다. 종교인으로는 김수환 추기경이 장수하고 있고, 경제계 인사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유일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이른바 X파일 파동에 이어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로 연이어 곤궁에 빠져 있는 시점에 2위(39.4%)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역대 경제인 중에서 그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은 없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때 2위를 차지했지만, 엄밀히 보면 경제인으로서보다는 햇볕정책 실천자로서 활발하게 대북 사업을 벌일 때 거둔 성적이었다. 따라서 이건희 회장이 2위에 오른 것은 삼성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순영향을 각계 전문가들이 수긍하고 있는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삼성과 노무현 정권의 ‘선린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이슈들이 이회장의 지목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건희 회장은 1992년 7위로 처음 톱10에 이름을 올린 이래 중위권에서 머무르다가 노무현 정부 시대에 와서 급속히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2003년에 3위(18.9%), 지난해에는 2위(38.6%)였다.

3위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22.4%).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같은 순위다. 지목률은 약간 내려갔다(지난해 27.8%). 일국의 야당 대표로서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수치이다. 정치인 대상 조사에서 박대표의 영향력이 이건희 회장보다 더 크게 나온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야당 대표를 넘어서 대권까지 바라본다고 했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같은 당의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의 기세가 무섭기 때문이다. 4위(17.1%)를 차지한 이명박 시장은 지난해(3.3%)에 비해 무려 네 배 이상 지지도를 키웠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 감을 묻는 설문에서 둘의 순위는 극적으로 역전되었다(00쪽 기사 참조).

한나라당의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여권의 차기 주자들은 아직 탄력을 받지 못하는 양상이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한국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 6위(5.3%)에 꼽혔고,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8위(3.8%), 고 건 전 국무총리가 9위(3.7%)를 차지했다. 또 한명의 차기 주자인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은 아직 순위권 밖에 머물러 있다.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 장관은 지난해에 비해 지목률이 낮아졌다. 고 건 전 총리는 올해 톱10에 다시 복귀했다.

고 전 총리는 각종 국민여론조사에서 차기 지지율 1위에 올라 있다. <시사저널>의 이번 전문가 조사에서도 차기 대통령감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영향력을 측정하는 이번 조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고 건 지지율의 허점이 유독 두드러진다. 고씨는 법조인·정치인·사회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0위권 안에 들지 못했다. 특히 고씨를 영향력 있는 인물로 지목한 정치인은 조사 대상자 10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결과로 보면 그에게는 본선보다 예선이 더 힘든 난코스가 될 것이다.

이건희, 2위 고수…고 건, 톱10 복귀

열린우리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는 정동영 통일부장관도 처지가 비슷하다. 정장관은 행정관료와 종교인 상대 조사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특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의장을 겸임하면서 통일·외교·안보 부처를 총괄하고 있는 ‘실세’ 정장관이 부하 관료들로부터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행정관료 가운데 단 4명만이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명 중 한 명으로 그를 꼽았다.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5위(9.7%)를 차지한 것은 줄기세포와 배아 복제 연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전문가 그룹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황교수는 종교인 대상 조사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 5위에 뽑혔다. 물론 영향력이 지지율과는 다르므로, 이 수치는 황교수의 연구가 종교인들에게 무거운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 14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내민 사람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그는 올해에도 10위(3.2)에 턱걸이하며 기록을 갱신했다.

김추기경과 함께 12년째 장수하다가 지난해 탈락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올해 7위(3.9%)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시끄러운 시국이 그를 다시 불렀지만, 그의 부활에 정치적인 해석까지 들이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전문가 집단 중 유일하게 정치인들은 그를 ‘영향력 10걸’ 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사 순위에서도 그의 이름은 10위권 밖에서 발견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