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기름은 다시 크렘린으로 흐른다
  • 정다원 모스크바 통신원 ()
  • 승인 2005.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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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 가스프롬 사, 시브네프티 석유회사 인수 정부 ‘에너지 자원 통제 전략’ 일환

 
러시아 정부가 지난 1990년대 민영화했던 석유 회사들을 다시금 국영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가가 에너지 자원을 통제하려는 전략이다. 지난해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티’가 유코스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인수한 데 이어, 지난 9월 말 국영 가스프롬은 민영 석유회사 시브네프티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시브네프티는 러시아 석유업계에서 랭킹 5위를 차지하는 회사다. 이로써 세계 최대 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은 러시아 석유의 30% 이상을 장악하게 되었다.

지난 9월28일 가스프롬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대주주로 있는 밀하우스·캐피탈 회사로부터 시브네프티 주식의 72.7%를 1백30억 달러(주당 3.8 달러)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사들였다. 이로써 가스프롬은 자회사 가스프롬은행이 갖고 있는 시브네프티 지분 3%와 합쳐 총 75.7%를 보유하고 시브네프티 경영권을 거머쥐었다. 지난 1995년 아브라모비치는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공동으로 시브네프티(지분 51%)를 1억30만 달러에 불하받았다. 10년간 이득을 챙기고 백배 이상의 차익을 남겨 되팔아 넘긴 셈이다.

“다음은 수르구트 네프테 가스 차례”

시브네프티 인수를 위한 물밑 작업은 지난 7월에 시작되었다. 이 문제에 크렘린이 깊숙이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물밑 접촉이 한창일 무렵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기자 간담회에서 ‘거래는 시장 경제 원칙에 따라 이루어 질 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시브네프티 인수 경쟁에는 석유 사업 독점을 꿈꾸는 로스네프티가 끼어 들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중도에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다.

에너지 자원의 통제는 러시아 정부의 국가 전략이라는 점, 여기에 가스프롬이 전략적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알렉세이 밀레르 가스프롬 회장은 푸틴 대통령의 충성스러운 측근이자 전략 보좌관으로 통한다. 그는 ‘시브네프티 매입은 사업 다각화와 세계적인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결단’임을 강조했다.

가스프롬의 석유에 대한 야심은 러시아 안에서는 널리 알려져온 바다. 지난해 말 가스프롬은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인수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올해 초 이를 인수한 ‘로스네프티’와 합병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성사에 실패했다. 세간에서는 국영 석유 기업인 수르구트 네프테 가스가 가스프롬의 다음 표적이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이번 거래가 금액 면에서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만큼 이에 대한 평가도 다양했다. 대략 ‘윈윈 거래’였다는 평가다.

우선 가스프롬은 국영 회사로서 국가의 정책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즉 시브네프티라는 거대한 석유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국가 전략 차원에서 석유 사업을 경영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게다가 싸게 구매했다. 허미티지 재단의 최고 경영자인 빌 브라우더는, 시브네프티가 국제 시장에서 경매에 붙여졌더라면 실제 거래된 액수의 두 배는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현재의 높은 국제 석유 가격을 감안할 때 적자 경영을 할 가능성도 전혀 없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의 성공적 거래를 입에 담는 전문가가 많다. 싸게 회사를 팔아 넘겼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득을 많이 보았다는 평이다. 크렘린의 의도를 분명하게 간파하고 간접적으로 충성심을 보여줌으로써, 2003년 유코스-시브네프티 합병 계획 이후 그를 겨냥한 크렘린의 매서운 칼날을 피함은 물론, 권력의 총애까지 받게 되었다는 얘기다.

유코스 전 사장 미하일 호도롭스키의 선례는 그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었다. 호도로프스키는 크렘린에 각을 세우다 세금 포탈, 살인 방조 혐의 등 8가지 죄목으로 잡혀 8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호도로프스키가 구속되고 난 후 ‘다음 차례는 아브라모비치’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크렘린의 미움을 받고 영국 런던으로 도피한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는 사업 파트너로서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이번 거래에서 보여준 충성 덕분에 그는 크렘린의 미움을 벗어나 총애를 샀고, 오는 12월에 임기가 만료되는 추코트카 주지사 직을 연임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최근 그는 추코트카 주지사 직에 재임하겠다는 의사를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극동관구 대통령 전권 대표에게 통보했다. 지난해 지방 자치제 법이 바뀐 후부터 이전에 주지사는 선거에 의해 뽑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한편 이번 거래를 두고 러시아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브네프티의 국유화는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관측했다. 즉, 국영 기업은 민영 기업보다 방만하게 경영되는 탓에 경제 면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라는 말이다. 일례로 유간스크 네프테 가스가 로스네프티로 넘어간 이후, 러시아의 석유 생산 증가율이 둔화되었다. 프로스퍼리티 재단 대표인 매티아스 웨스트맨은 “가스프롬은 독립된 여러 회사로 분리·경영하는 것이 좋다”라고 전제하고, “가스프롬이 회사를 효율적으로 경영하려면 공룡처럼 몸집을 불리기보다는 몇 개의 독립된 회사들로 쪼개서 운영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석유·가스 분야 분석가인 발레리 네스테로프도 “시브네프티의 국영화는 사회·정치적 비용을 증대시키고, 부패와의 전쟁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현재 언론들은 ‘38세의 젊은 갑부 아브라모비치가 향후 어떤 일을 할까’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그가 사들인 영국의 ‘첼시’ 프로 축구단 경영에 열중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이번 거래에서 아브라모비치는 최소 90억 달러의 현금을 손에 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돈을 수중에 있는 1백33억 달러와 합쳐 은행에 예치하거나 초대형 빌딩을 구입하고, 여기서 나오는 이자나 임대 수입으로 첼시 축구단을 운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 언론들의 시각은 다르다. 하나는 아브라모비치가 대형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크렘린의 신임을 좀더 얻은 뒤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세계적인 거대 사업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다른 하나는 자선 사업에 몰두하리라는 예상이다. 록펠러나 카네기 등 미국 재벌의 선례로 볼 때 아브라모비치는 초대형 자선 재단을 세울 것이란 분석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4살 때 고아가 되었고, 대학을 중퇴한 뒤 플라스틱 오리 장난감을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해 세계적인 갑부로 입신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추코트카 주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그가 골치 아픈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지역 발전을 위해서 돈과 정열을 바칠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돈을 챙겨서 달갑지 않은 조국 러시아와 영원히 작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이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거액의 돈을 챙겨 해외로 도피하는 그를 러시아 정부가 방관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돈줄 ‘검은 황금’에 얽힌 드라마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갑부 아브라모비치에 각별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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