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금 따는 콩밭> 씌어진 이유 있었네
  • 강유원(동국대 강사, 철학) ()
  • 승인 2005.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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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황금광 시대>/1930년대 ‘한국판 골드러시’의 역사

 
구한말 개항 이후의 한반도 역사는 세계사와의 연관 속에서 서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거론해보자.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1930년대는, 농민들은 친일파 지주들의 수탈에 신음하고, 노동자들은 강제 노역이나 진배없는 극심한 저임금에 시달리고, 도시에는 실업자와 건달들이 그득하고, 산야에는 화전민들이 진을 치고, 독립투사들은 간악한 친일파의 밀고로 감옥에 갇혀 고등계 순사의 물 고문·고춧가루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이 식민지 근대화는커녕 이처럼 고통으로 가득 찼던 이유를 물어보면 “식민지니까 그런 거지”라는 거의 동어반복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 나갔을 터인데, 그렇다면 나 역시 무의식중에 ‘식민지’에 모든 사태를 환원시키고 있었던 셈이겠다. 어쨌든 그 이유는 출발부터 ‘글로벌 캐피탈리즘’이었던 세계 자본주의 경제 상황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토록 혹심한 시절에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과 <노다지>, 김기진의 <장덕대>, 방인희의 <황금광 시대>, 채만식의 <금의 정열>과 같은 소설의 주제로 표출될 정도로 황망해 보이는 황금 열망이 불어닥쳐 한반도 천지가 들쑤셔진 것도 마찬가지 원천에 근거하여 답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 시대를 기반으로부터 이해하는 출발점이요 총체적 통찰의 단초이다.

그러면 1930년대, 즉 전간기(戰間期) 세계 경제와 조선의 식민 본국 일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연합국들은 탄약 및 기타 물자의 보급을 전쟁의 포화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일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전쟁 물자 공급을 통해 일본의 산업은 군수산업·경공업·농업 할 것 없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도 그나마 살 만했다. 그러나 ‘전후 정비가 일단락된 1920년을 고비로 세계 경제는 공황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후 복구가 끝나고 유럽의 공장들이 재가동되기가 무섭게 과잉 생산 문제가 발생한 탓이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경제 상황은 급격히 악화했다.’ 그 뒤 미국과 유럽은 경제를 회복시켜 갔으나 일본은 관동대지진, 무능한 정부 등의 악재가 겹쳐 ‘‘금융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에 거대한 해일이 덮쳤다. 1929년 대공황. 모든 것의 가격은 떨어졌다. 그러나 금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금본위제에서 금은 상품이 아니라 돈’이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계속 혼란이었다.

 
일본이 그토록 ‘금’에 목말라한 까닭

일본의 선택은 딱 하나가 남았다. ‘정당 정치를 종식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극우파 군부.’ 독일의 나치와 마찬가지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공황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기적적 기사회생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일본은 심각한 금 유실로 신용 경색의 위기에 몰린 데다 전세계적으로 금본위제가 정지되면서 해외에서 금을 수입해올 길까지 막히게 되었다. 국가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한 군부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미국에 대항한 일전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전쟁을 치르려면 군비 확충과 함께 비상시에도 효험을 발휘하는 유일의 국제 통화인 금을 확보하는 일이 절실했다. 그들은 황금이 필요했고, 황금이 부족했고, 황금에 목말랐다. 따라서 산금매상안(産金買上案)이란 대장성의 계획이기 이전에 대전을 준비하던 군부의 음모였던 것이다.’

황금광 시대,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황금광 시대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낮에는 금을 캐고 밤에는 글을 쓴 김기진’도, ‘풍년에 배가 고픈 농민들’도, ‘투기꾼과 사기꾼’도 그런 일화들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읽고 나면 한탕주의는 비뚤어지고 파탄 난 심성에서 파생된 시속(時俗)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태라는 자각이 떠올라 온다. 지난 1990년대의 아수라장에서 거의 다 패배해버리고, ‘지금 남은 게 별로 없는데, 남은 인생 뭐 있겠어’라는 말들을 합창하는, 그 패기에 찼던 선배·후배·동료들의 오늘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진다. 참으로 징그러운 세상이다.

 
저자 스스로 규정한 ‘국문학자의 금광 연구’는 썩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듯하다. 상세한 통계가 필요하면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올 봄에 쓴 <개발 없는 개발>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를 뒤흔든 투기와 욕망의 인간사'라는 별로 적절하지 않은 부제를 없앤다면 2005년에 출간된 가장 값진 인문학 책 중 한 권이라고 권해도 부족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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