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01호는 왜 '새집'에 못갔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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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이 경복궁에 홀로 남은 속사정
가족과 헤어진 그는 친구마저 잃었다. 친구들이 모두 용산으로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았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거 국립중앙박물관) 옆 뜰에 그는 말없이 서 있다. 국보 101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이 그 주인공이다.

 
이 부도탑은 고려 문종 21년(1067년) 만들어졌는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부도탑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지광국사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페르시아풍의 화려한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시대 들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이다’.

경복궁 뜰에 있던 남계원 7층석탑, 길항사 석탑 등 다른 석조 문화재들이 모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갔지만 이 탑만 경복궁에 남은 까닭은 무엇일까.

국립고궁박물관 소재구 관장은 “옮기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이 난 것을 1957년 시멘트로 붙여 놓았기 때문에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일단 그냥 두라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경천사탑처럼 완전히 해체해서 수리·복원하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홀로 남게 된 사연도 가슴 아프지만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던 이 탑이 경복궁에 오기까지의 과정도 파란만장하다. 일제 시대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반출되어 서울로 옮겨졌다가 다른 일본인에게 팔려 일본 오사카로 실려간 이 탑은 당시 데라우치 총독의 명령으로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복궁에 터를 잡았다.

부론면 법천사터는 지난 8월 사적 46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는데, 2001년부터 네 차례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건물지, 석축, 연화대석 등이 나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원래 있던 곳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원주 지역민들이 끈질기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탑이 고향을 찾아갈지 두고볼 일이다. 원주문화원은 1995년부터 원주시 상공회의소 등과 함께 이 탑 반환 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만약 그런 논리에 따라 문화재를 돌려준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을 문화재 얼마나 되겠냐”라고 반문했다.

원주 쪽에서도 반환 주장을 접고 모형을 세우는 쪽으로 선회하는 흐름도 있기 때문에 지광국사현묘탑은 당분간 경복궁에 머무르다가 중환자 수술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순서를 밟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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