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라크 탈출 전략 없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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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린 어페어스>, 한국전쟁·베트남 전쟁 교훈 통한 ‘이라크 처방’ 제시

 
이라크 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미국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미국 사회를 양분하며 심한 후유증을 낳았던 베트남 전쟁 꼴 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이른바 ‘베트남 신드롬’에 대한 우려다.

베트남 신드롬에 대한 논의는 당초 부시 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필요성을 역설하던 2002년 무렵부터 일부 전쟁 반대론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가 개전 무렵인 2003년 3월 사그라졌다. 똑같은 주제이기는 하지만 최근 진행되는 논의는 수준과 강도 면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르다. 이제 미국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색을 하고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미국의 영향력 있는 외교 전문 평론지 <포린 어페어스>이다.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포린 어페어스> 최신호는 <이라크와 베트남>이라는 제목으로, 장차 미국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논하는 논문 2편을 실었다.

첫 번째 논문은 1970년대 초반 2기 닉슨 정부 시절 국방장관으로서 미국의 철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던 멜빈 R. 레어드가 쓴 것이다. 그는 일단 베트남 전쟁이 ‘볼썽사납고, 잘못 처리되었으며, 비극적인 미국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이라크의 최근 상황을 베트남 전쟁 전례와 똑같이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미국의 베트남 철군 정책을 지휘한 당사자로서 그는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보아왔을까. 그는 논문 전반부에서 전쟁의 전개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소회를 토로했다. 자신은 미국의 대외 정책 등에 대해 지난 30년간 침묵을 지켜왔는데, 이는 옛 정부 출신(old guard)으로서 새 행정부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것은 금도에 어긋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이라크 전쟁 과정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밝혔다. 30년간 침묵을 지키던 전 국방장관까지 나섰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에 이라크 전쟁 실패에 대한 ‘위기 의식’이 그만큼 넓게 퍼져 있다는 반증이다.

이라크 전쟁 명분 사라져 참전 지지율 추락

그가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라크 처리에 대해 미국 시민과 미국 정부를 향해 던지는 충고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베트남 전쟁의 상태가 악화했던 데에는 ‘언론의 호들갑’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이라크 전쟁에서 이같은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베트남 전쟁의 또 다른 실패 원인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미국화’한 탓, 즉 ‘미국이 직접 싸우는 전쟁’으로 만든 탓이 크므로, 이라크에서는 이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이라크에서 민주화가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단계적인 철수 방안을 마련해 되도록 빨리 시행하라’는 주문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라크 전쟁 효과는 이미 중동 전역에 나타나고 있다’고 부시 정부를 두둔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방위비 증액을 주장했다. 미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민주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방위비 증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린 어페이스> 이라크 특집의 두 번째 논문 필자는 존 뮤엘러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교수다. 그는 논문에서 이라크 전쟁 추이에 따른 전쟁 찬반 여론 동향을 한국전쟁·베트남 전쟁 때와 비교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이 치른 세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개전 초기에는 전쟁 지지 여론이 급격히 고조되었다가,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희생자가 많이 날수록 여론이 급격히 악화했다는 것이다.

 
뮤엘러 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자국군 희생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내력이 과거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사례와 비교해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현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1968년 베트남에서 미군 2만명의 희생자를 냈던 ‘구정 대공세’ 때와 이라크 전장에서 사망자 수가 1천5백명을 넘어선 올해 초반의 여론 상황을 대조했다. 그 결과, 두 시점의 전쟁 찬성률은 ‘50% 이하’로 비슷했다.

뮤엘러 교수는 ‘겨우’ 1천5백명이 희생되었을 때의 전쟁 지지율이 과거 2만명 이상이 죽었을 때의 전쟁 지지율과 같게 나온 것은, 이라크 전쟁의 경우, ‘전쟁의 주요 명분(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제거)이 증발’한 탓으로 풀이했다. 즉 미국 시민 대다수는 명분이 사라진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상태대로라면 미국은 ‘베트남 신드롬’에 버금가는 ‘이라크 신드롬’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베트남 전쟁, 나아가 한국전쟁 교훈을 통한 이라크 전쟁 처방은 이처럼 논자에 따라 팽팽히 갈리고 있지만, 양측의 주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도 발견된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제 어떻게 전장에서 빠져나올지에 대한 방안, 즉 효과적인 ‘탈출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 잠복해 있겠지만 내년에 있을 미국 연방 의원 중간 선거 때 격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때의 정치 바람은 한반도 정세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이 이라크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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