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다고요? 영화 보러 갑시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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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심리 치료에 응용하려는 움직임 확산

 
영화는 힘이 세다. 사는 동안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내 인생의 책’을 꼽아 보라면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내 인생의 영화’를 꼽는 데는 망설임이 없다. 책이나 미술·공연 같은 다른 예술에 비해 접하기 쉽고, 즐기기 쉽고, 그러면서도 강력한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이를 심리 치료에 응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9월 사이월드에 문을 연 ‘영화 치료 모임’ 카페에는 4백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해 있다. 청소년 문제나 부부 갈등 상담을 할 때 영화 치료를 도입하는 임상심리학자도 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이면서 영화 평론가로 더 유명한 심영섭씨는 지난 11월12일 서울 암사동에 국내 최초의 영화 치료 상담 센터 ‘사이’를 오픈했다(인터뷰 상자 기사 참조).

영화 치료(시네마테라피)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한 한국과 달리 외국에서는 영화를 이용한 심리 치료가 이미 널리 퍼져 있다. 비디오 보급이 보편화한 1990년대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한 예로 미국 정신의학 저널에는 <플래툰> <디어 헌터> 같은 베트남 전쟁 소재 영화를 참전 군인들에게 보여주고 상담함으로써 이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뒤 나타나는 정신적 장애)를 개선시켰다는 보고가 실려 있다. <영화 처방전>처럼 일반인이 자가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 영화 치료서도 다수 나와 있다. 

눈치 빠른 이는 알아챘겠지만 영화 치료는 미술 치료·음악 치료·연극 치료 같은 예술 치료와 궤를 같이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따위 예술 행위를 통해 환자로 하여금 숨겨진 불안과 심리적 외상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치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예술 치료의 원리이다. 

단 영화 치료는 이렇게 ‘드러냄’(표현)이 주가 되는 다른 예술 치료들과 달리 ‘감상’에 더 방점이 찍힌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이를 심리 치료에 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 치료는 오히려 독서 치료와 닮았다.

부부 관계 상담을 할 때 영화 치료를 도입하고 있는 홍인종 교수(한국장로회신학대)는 “잘 연출된 영화 속에는 다양한 인간 관계와 갈등이 녹아 있으므로 일반인들이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이를 자기 문제에 적용해 보기가 쉽다”라고 말했다. 상담자에게 자기 얘기를 직접 털어놓기 꺼리는 사람도 영화를 통하면 덜 방어적이 된다는 것 또한 영화 치료의 강점이다. 

그렇다면 영화 치료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일단은 영화를 보면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행위 자체가 낮은 수준의 치료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반인들도 삶이 우울할 때, 또는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보고 싶은 영화 한두 개쯤은 마음 속에 품고 있게 마련이다. 더 다양한 영화를 접하고 싶다면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영화 목록을 참조하는 것도 방법이다(딸린 기사 참조).

단 이런 식의 자가 치료(전문 용어로는 ‘자기조력적 치료’라고 한다)는 잔류 효과가 적다는 점이 한계라고 심영섭씨는 지적한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강렬한 정서적 반응이 일어날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이를 행동으로 고정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기업 CEO들도 리더십 교육 받아

전문적인 치료의 필요성은 여기서 제기된다. 영화 치료는 보통 집단 상담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상담 현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영화 치료의 첫 단계는 ‘동일시’인데, 같은 영화를 보고도 사람마다 동일시하는 대상이 제각각인 것이다.

이를테면 치매 노인을 간병할 사람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영화 <여인 40>을 텍스트로 제공하면, 감상자들의 반응은 연령대 별로 나뉜다. 곧 젊은 여성들은 며느리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치매 노인을 비난하는 반면, 나이 든 여성들은 노인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며느리를 욕한다.

 
최근 국내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영화 치료를 응용한 리더십 교육을 받았는데, 여기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곧 관계 지향적인 리더는 <캐스트 어웨이> 초반부의 척 놀랜드(톰 행크스 분)처럼 ‘성취’를 위해 여타의 것들을 희생시키는 리더십을 답답해 하고, 과제 지향적인 리더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처럼 ‘관계’를 최우선에 놓는 리더십을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카타르시스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따라서 훈련받은 상담자는 이들에게 ‘현재의 나’를 상기시킴으로써 이들이 자신의 문제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돕는다. 곧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의사 소통 및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취 지향적인 리더가 자신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키팅 선생의 리더십이 지닌 장점까지 취하게 된다면 영화 치료의 효과는 충분히 달성된 셈이다.

최근 영화 치료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단계로까지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2002년 발표된 셀프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같은 ‘영화 만들기 치료’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미국 유학 시절 심한 거식증에 걸렸던 김진아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음식=엄마’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통찰을 얻었고, 그 결과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 BR>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경우 이처럼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심리 치료가 더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는 것이 홍인종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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