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늑장 처리는 ‘당연지사’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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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 등으로 10월 말까지 심사 불가능…당리당략 겹쳐 법정 기한은 무용지물

 
결국 2006년도 예산안 처리가 12월12일 시작되는 임시국회(회기 30일)로 넘어갔다. 국회는 법정처리 시한인 12월2일을 이미 넘긴 것은 물론 정기국회 회기 마지막 날인 9일에도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계수조정 작업이 덜 끝나 예산안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위원장 강봉균 열린우리당 의원) 전체 회의에도 올리지 못했으니 본회의 상정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행정부에서 나라 살림을 편성하는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입법부는 1989년 최초로 법정 기한을 어긴 이후 지난해까지 총 16년 동안 열한 번이나 헌법을 위반했다. 법정 기간을 준수한 다섯 번의 경우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2년과 1997년, 2002년을 빼면 단 두 번뿐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예산안을 법정 처리 시한보다 2주일에서 한 달 가까이 앞서 처리하는 ‘괴력’을 보였다. 1998년 이후 헌법 위반 정도가 갈수록 악화하는 것도 문제다. 조금씩 늦어지더니 급기야 2005년 예산은 2004년 12월31일 자정을 20분 남긴 11시40분에야 가까스레 볼모 신세를 면했다.

늑장 처리 ‘제도화’하는 정치 관행

국회의원들이 예산안 법정 시한을 위반하면  흔히 ‘법을 만들고 지켜야 할’ 따위로 도덕적 질타를 가하지만, 연쇄 후유증이라는 현실적 파장이 훨씬 크다. 헌법 54조2항에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2일까지 입법부가 예산안을 처리하도록 못박은 것은 정부의 예산안 공고, 분기별 예산 배정 계획, 월별 자금 계획 수립 작업이 한 달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어 중앙 정부의 이런 작업이 밀리면 지방자치단체와 정부투자기관 등도 연쇄 영향을 받는다. 중앙 정부의 보조금·출연금 등이 확정되지 않은 터라 수정을 전제로 대충 예산을 편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이 12월8일 박근혜 대표에게 12월 중순과 하순 각각 광역 및 기초단체 의회 회기가 끝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도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면 이들이 민생과 관련된 사업 계획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산안 처리 지연은 중앙 정부의 사업 집행에도 불똥이 튄다. 올 예산이 지난해 12월31일에 통과하는 바람에 올 상반기에 집중 배정하려던 일자리 창출 사업 등이 차질을 빚었던 것이 좋은 예다. 결국 예산안 처리 지연은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

 
이런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두를 만하건만 국회는 왜 거의 매년 상습적으로 예산안을 늑장 처리하는 것일까.  우선 정치권이 이른바 ‘쟁점 법안’을 놓고 정치적 격돌을 벌여온 것을 지연 사유에 넣을 수 있다. 매년 세밑 여의도 정가를 달구는 이 쟁점 법안들 처리를 왕왕 예산안과 연계해왔기 때문이다. 이 법안들은 예산안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가령 올해의 경우 금산법과 사립학교법은 관련이 없지만, 종합부동산세법 등 8·31 부동산 관련 세법과 감세법안들은 예산안과 직결되는 법률들이다. 예산 전문가들은, 법안을 둘러싼 충돌 등이 지체 사유가 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 관행 자체가 늑장 처리를 ‘제도화’하는 구조적 측면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은 올해 예산안 심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설득력을 갖는다. 정부는 올해도 어김없이 회계연도 개시 90일(10월2일) 전까지 예산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헌법에 따라 9월28일 2006년도 예산안을 국회로 넘겼다. 하지만 정작 국회가 예산안 심사에 착수한 것은 11월 초였다. 한 달 이상 예산안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예결위원 보좌관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말했다. 예산안이 국정감사(9월22일~10월11일) 와중에 도착해 관심을 둘 수가 없었고 또 국감이 끝나도 곧바로 들여다보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국감이 끝나면 10월 말까지 각 상임위가 열린다. 여기서 각종 법안과 추가경정예산안 심의를 진행하고 이때 대정부 질문도 벌인다. 올해의 경우는 ‘10·26 재선거’라는 특별 이슈도 가세했다. 의사 일정 자체가 10월 말까지는 아무도 예산안에 주목하지 않게 짜여 있었던 셈이다.

16개 상임위는 11월 초부터 예산안 예비 심사를 벌였지만, 예결위 처지에서는 혹 붙인 격이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상임위가 소관 부처 예산을 늘리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예결위에서 칼질을 당하겠지만, 의원들은 선심 팍팍 써서 좋고 소관 부처 공무원들도 말릴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관행’으로 치부되는 도덕적 해이가 예결위 부담을 가중시킨다. 올해 16개 상임위의 예비 심사 결과 예산안은 정부 안보다 1조5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상임위 심사가 끝난 뒤 예결위가 본격 가동된 것은 11월14일이었다. 예결위의 당초 계획은 12월2일 예산안을 정부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종합정책 질의(14~15일)→부별 심사(17~22일)→계수조정 소위 구성(21일)→소위 가동(24~29일)→예결위 통과(30일)→본회의 의결(12월2일)로 일정을 잡은 것이다.

부별 심사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는데, 계수 조정 소위를 구성하는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위원 수를 놓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옥신각신하다가 소위 구성에 합의한 것이 예정보다 4일 늦은 11월25일이고 28일부터 지각 가동했다. 소위 가동부터 본회의 의결까지 무리가 없으려면 통상 보름가량 걸리는데 여권은 4~5일 만에 해치우려는 과잉 의욕을 보였다.

실제로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다. 예결위가 11월28일부터 12월2일까지 5일간 처리한 것은 16개 상임위 소관 예산안과 특별회계와 기금에 대한 감액안 심사를 벌여 총 9천여억원의 세출 예산을 줄인 것이다. 한나라당이 칼을 벼리고 있는 8조9천억원 삭감안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물론 여당은 한나라당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하지만, 다음 단계인 증액안 심사에서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한푼도 증액을 수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히려 여전히 부처별 경상경비와 사업비 50조원 가운데 5%만 삭감해도 2조5천억원을 절감할 수 있다든가 1천3백6억원의 부처 홍보 예산을 깎겠다며 감액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12월9일 현재 예결위는 증액안 심사 막바지 단계에 있다. 이른바 ‘쪽지’를 통한 지역구 민원 사업이나 각당 지도부 고려 사업이 끼어드는 것이 이때다. 다 들어줄 수는 없고 무엇을 잘라내느냐를 둘러싸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예결위는 이후에도 기금안 심사, 감액안·증액안에 대한 2차 심사를 거쳐야 예산안을 전체 회의에 상정할 수 있어 아직 갈길이 멀다.

 처음부터 국회가 무리한 일정을 잡았다는 지적에 예결위 여당 간사인 김영춘 의원은 견해를 달리했다. “일정 자체가 빠듯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예결위 계수조정 소위가 정부안의 비효율성을 도려내기 위해 원래 임무인 예산의 전체 규모와 체계를 맞추는 작업에만 매진한다면 일주일 만에도 끝낼 수 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계수조정 소위가 상임위의 예산 심의권을 부정하는 듯한 한나라당 주도로 사실상 상임위 심사를 다시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늦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 예결위원인 이종구 의원은 “상임위와 부처 이기주의로 부풀려진 예산을 바로잡으려면 소위 활동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반박했다.
  
여권은 예산안을 늦어도 12월15~16일께 예결위 전체회의에 올리고 19~20일에는 본회의에 상정할 계획이다. 이 계획은 임시 국회로 넘어간 종합부동산법 등 8·31 대책 후속 법안과 감세안 향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들 법안의 처리 향배에 따라 수조원의 세입이 왔다 갔다 할 뿐더러 예산안 처리와 연계하려들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법안과 예산안의 전도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12월9일 한나라당의 저지 속에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한 사립학교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여의도 정가에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한나라당은 임시국회도 사실상 보이코트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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