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바위뚫은 뚝심의 계란던지기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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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개정 숨은 주역 고은광순씨 정공법으로 '화끈한 투쟁' 주도

인권의 관점에서, 올해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이 비로소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게 된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월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가 헌법에 불합치한다고 판정한 데 이어, 3월 국회가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7월에는 출가한 여성을 종중 회원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도 있었다. 

 
이렇게 양성 평등의 역사가 새로 쓰이기까지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1958년 민법이 제정된 이후 50년 가까이 호주제 폐지 운동을 벌여온 한국가정법률상담소, 1999년 이를 시민 운동으로 본격 조직화한 호주제폐지운동본부,  지은희(전 여성부장관)·이미경(열린우리당 의원) 등 정부와 국회에서 고군분투하며 호주제 폐지안을 관철한 여성 정치인, 부계혈통제가 우리 전통이 아닐 뿐더러 생물학적으로도 모순됨을 헌재에서 공개 증언한 김상용 교수(부산대·법학) 및 최재천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 이들은 호주제 폐지의 일등 공신으로 손꼽힌다.

<시사저널>은 이 중에서도 고은광순씨(50·한의사)에 주목했다. ‘쿨’하게 진행되던 호주제 폐지 운동을 대중 속으로 ‘핫’하게 끌어들이는 데 그녀의 역할이 누구보다 지대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의 긴 역사에서 그녀만큼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선 이는 드물었다.

물론 그녀의 방식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리 여자들을 암컷 바퀴벌레 취급하는 모오든 법과 제도와 관습을 뜯어고치겠다는데…그게 떫냠마?”(고은광순 시 <취중진담>)라며 세상에 거칠게 시비를 건 그녀는 일부에게는 카타르시스, 일부에게는 감당 불능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도발에 이성을 잃은 호주제 존치론자들은 그녀가 참여한 호폐모(‘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인터넷 게시판에 ‘앉아서 오줌 싸는 빨갱이년’이라는 둥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쏟아내곤 했다.

호주제 존치론자들과 원색 대결도 불사

그러나 호주제 폐지가 확정된 지금, 그녀는 자신을 공격했던 이같은 ‘사이버 마초’들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전한다며 여유를 부렸다. 이들 덕분에 언뜻 문명화한 것 같아 보이는 우리 사회에 ‘무지막지한 찌질이’들이 대거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란다.

1995년 ‘안기부에서 나온 아줌마 이야기’라는 시리즈물로 인터넷에 필명을 처음 알릴 때부터 그녀의 도발은 어느 정도 계산된 것이었다. 점잔 빼는 말로 상대의 가면을 벗겨내기란 쉽지 않다. 민법이 “어려서는 아버지, 결혼 후에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 아들이 죽은 뒤에는 손자 말을 듣고 좇으라는” 사종지도(四從之道)를 여성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입이 아프게 외쳐 보았자 기득권자인 남성들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이들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려면, 일단 이들을 진흙탕 싸움판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이를 위해 그녀가 동원한 ‘낚싯밥’이 바로 원색 언어였다. 여자가, 그것도 배웠다는 한의사가 이런 말을 공적으로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이버 상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호주제 폐지를 위한 거리 서명 운동에 처음 나섰던 1990년대 중후반만 해도 언제 어디서 주먹과 욕설이 날아들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이 와중에도 고은광순씨는 꿋꿋이 전위에 섰다. ‘치고 빠지기’는커녕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가 담긴 자신의 편지를 들고 국회의원 2백73명의 방을 열네 번씩 일일이 돌며 ‘치고 치고 또 치는’ 그녀의 투지에는 주변 사람들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호주제 폐지 이후 그녀는 오랫만에 느긋한 일상을 즐기는 중이다.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가족 문제를 다룬 외국 동화들을 번역하고, 마음 맞는 여자들끼리 만든 ‘십자매 관광단’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나는 동안 날 서 있던 그녀의 눈빛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물론 법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쉽게 바뀔 것이라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않는다. 2008년 호주제가 본격 폐지되고 새 신분등록부를 받게 되면 비로소 충격을 체감할 사람도 숱할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은 여자를 자기 집 대를 이을 귀신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는 데 그녀는 최소한의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나마 세상은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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