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도청 권한 의회가 주었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12.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시 대통령, ‘당당히’ 주장 한국계 존 유가 합법 논리 제공

 
현직 대통령이 자국민에 대한 비밀 도청을 지시했다? 정황을 모르는 독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법치주의의 모범을 자처하는 미국에서 목하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소위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자는 물론 영주권자, 나아가 관광객을 포함해 이 순간 미국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도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도청 주체는 중앙정보국이나 연방수사국이 아니라 해외 도청, 감청전문 기관인 국가안보국(NSA)이다. 이 기관은 테러분자 색출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대통령령에 따라 2002년부터 테러 용의자와 직간접으로 연계됐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들의 국제전화와 e메일을 도청해 왔다.

대통령과 부통령 등 부시 행정부 최핵심 인사 몇몇과 극소수 의회 지도자들만 알고 쉬쉬했던 이 충격적 도청 사실이 지난 12월 15일 권위의 뉴욕타임스를 통해 폭로된 뒤 미 정가가 잔뜩 어수선하다.

 비밀 도청지시의 장본인인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자 지난 17일 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이를 시인한 뒤 19일 송년 기자회견을 통해 비밀도청은 미국민의 안전보호를 위한 합법적 조치였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비밀 도청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면서 비밀도청 계획을 폭로된 것을 두고 ‘비열한 행위’라며 엉뚱하니 화살을 뉴욕타임스 측에 돌렸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우군 격인 일부 공화당 의원들조차 대통령의 초헌법적 조처를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는 그를 두고 ‘제왕적 대통령’이라 비아냥거리는 말까지 들린다. 특히 공화당 소속으로 상원 법사위원회 위원장인 알렌 스펙터 의원은 “대통령의 도청지시 행위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너무도 명백한 잘못”이라면서 내년 1월 의회가 개원하는 대로 청문회를 소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법사위원장 “대통령 청문회 열겠다”

의회의 심상치않은 기류를 반영하듯 미국인의 도서관 기록은 물론 인터넷 사용 내역까지 조사할 수도 있도록 한 애국법 개정안이 뉴욕타임스 폭로가 나온지 하루만에 상원에서 보기좋게 부결돼 개정안의 통과를 애타게 기다리던 부시 행정부에 타격을 입혔다.
    
뉴욕타임스는 비밀 도청에 관한 내용을 이미 1년 전에 파악하고도 백악관의 요청으로 최근까지도 보도를 자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지 폭로에 따르면 국가안보국은 중앙정보국이 ‘9.11 테러’의 주범으로 꼽히는 국제테러 조직 알 카에다의 해외 핵심요원들을 잇따라 검거하기 시작하던 2002년 초부터 소위 ‘특별수집계획’이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비밀 도청을 시작했다. 당시 중앙정보국은 테러범들이 이용하던 컴퓨터와 휴대폰, 개인용 전화번호부 등등을 압수했으며 이를 근거로 국가안보국은 하루 최고 5백명에 달하는 미국내 대상의 전화와 e메일을 집중 도청했다. 또 해외 감시 대상도 5천~7천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안보국은 알 카에다와 직접 관련된 전화와 e메일뿐 아니라 이와 연계된 주변 인물까지도 도청 대상에 포함시켰으며 그 대상은 대부분 국내보다는 해외에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안보국은 내규상, 국제전화 혹은 e메일의 수신자가 미국에 거주할 경우 설령 발신자가 해외에 있더라도 이를 도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미국내 수신자의 전화 등을 도청하려면 먼저 법무부 산하 대외정보감시법정의 판사에게 허락을 얻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는 국내 인사의 도청이 필요할 경우 판사의 승인을 얻어 연방수사국이 도청 임무를 떠맡아왔다. 그런데 2002년부터 내국인을 상대로 한 도청 임무가 국가안보국으로 비밀리에 넘겨진 셈이다.

지금도 연방수사국이 국내인을 대상으로 도청하기 위해선 법원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생활 보호에 관한 수정헌법 4조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난 2002년 초 국가안보국의 말썽많은 도청 작업이 개시된 직후 공화, 민주 양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딕 체니 부통령실에 초대돼 관련 브리핑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상원 정보위 부위원장인 존 록펠러 의원 등 일부 중진 의원들은 비밀 도청이 시행된지 1년이 지난 2003년에야 브리핑을 받았다.

의회 일부 지도자는 ‘도청 브리핑’ 받아

체니 부통령실이 주도해 의회 지도자들에게 브리핑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라도 ‘초법적’이란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에서는 국민의 사생활을 규율하는 어떤 조치도 의회를 거치지 않고는 위법일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법원의 명령에 의하지 않은 비밀 도청인 경우 더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이 이처럼 무리수를 둬가며 비밀도청을 허용한 데는 부시 1기 때 법무부 부차관보를 지냈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법대 교수로 있는 존 유가 제공한 법논리가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계인 유교수는 ‘9.11 테러’ 며칠 뒤 작성한 내부 회람용 메모에서 ‘정부는 영장을 발부받지 않고도 법집행 기관을 거치지 않은채 보다 강력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전화 감청을 허용하는 전자 감시기술과 장비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술 더 떠 유씨는 ‘이같은 행동이 사생활 보호를 명문화한 헌법을 위배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테러공격과 같은 엄청난 재앙 앞에서 정부는 개인의 자유침해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조치를 취함에 있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의 논리에 힘을 얻은 법무부가 이듬해부터 국가안보를 이유로 영장없는 전자감청 문제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핵심은 ‘헌법은 대통령에게 외국 혹은 외국인에 대해 영장없는 정보감시를 행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시 대통령은 법무부가 내세운 논리보다는 오히려 의회가 자신에게 그런 권한을 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법률고문을 지낸 뒤 지금은 법무장관으로 있는 알베르토 곤잘레스의 설명이 흥미롭다. 곤잘레스 장관은 지난 1978년 제정된 대외정보감시법에 따르면 도청을 하려면 법원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지만 의회가 별도의 조처를 통해 승인하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9.11 테러’ 직후 의회가 통과시킨 ‘군사력 사용에 관한 결의안’을 상기시켰다.

 당시 결의안이 비밀 도청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테러 예방을 위해 서라면 대통령에게 나라든 조직이든 혹은 개인이든 모든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돼 있다는 게 곤잘레스의 설명이다. 그러나 당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민주당의 러셀 파인골드 상원의원은 NBC TV에 출연해 “당시 결의안이 미군의 대아프간 테러전에 관한 것인 줄 알았지 비밀 도청을 허용하는 권한을 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은 우리가 결토 통과시키지 않은 법을 꾸며낸 것 같다”며 부시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런 가운데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 4명이 데니스 해스터트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도청파문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촉구한데 이어 내년 초 상원 법사위까지 청문회를 개최할 태세여서 부시 대통령은 이래저래 수심이 깊어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