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미국 빈민의 벗이 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 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5.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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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대통령, ‘반부시’ 노림수로 뉴욕 브롱크스 저소득층에 석유 원조

 
미국 정부가 오래 전부터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혐오하는 정부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부가 미국의 처지에서 그에 못지않은 미 혐오 국가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석유 가격이 앙등하면서 최대 산유국중의 하나인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가 미국을 다루는 태도는 더 기고만장해졌다.
 
지난 11월 아르헨티나 국제 휴양지 마르델 플라타에서 개최된 남아메리카 정상 회담에서 베네수엘라는 ‘라틴 국가의 경제를 통합할 수 있는 카드(석유)를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실제 베네수엘라는 자국 남부에서 브라질 아마존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8천km~1만km 길이의 송유관 건설에 합의했을 뿐 아니라(투자 총액이 1백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됨), 아르헨티나 기술을 도입해 원자력 발전소 건설까지 계획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국영 석유공사(Pdvsa)는 미국 주재 자회사인 치코와 지난 12월7일, 미국 뉴욕 브롱크스 빈민가의 겨울철 난방을 위해 40% 할인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키로 한 계약에 서명했다. 이 계약에 따라 내년 4월1일 이전까지, 3만2백 ㎥의 난방용 석유가 미국으로 공급된다.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미국 빈민층 지원은 이미 지난 11월 미국 메사추세츠 주 보스톤의 저소득층에 대한 석유 공급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미국의 뉴욕 타임스에는 "베네수엘라는 메사추세츠 주 가정의 온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이번 치코와의 계약으로  대상 지역이 확대되고 난방용 연료 지원이 본격화한다.

미국 빈민층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석유 지원은 지난 2004년 11월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에 갔던 차베스가 푸에르토리코 출신 호세 세르라노 민주당 의원의 초대를 받고 라틴 출신 빈민들의 주 거주지인 브롱크스를 둘러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저소득층에 대한 겨울철  난방 연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미국 보스톤의 병원·실직자 숙소·탁아소·학교 등 공공 시설과 약 4만 세대의 빈민들도 베네수엘라로부터 비슷한 ‘은혜’를 입는다.  치코의 대표 펠릭스 로드리게스는 미국 뉴욕 브롱크스 지역의 3개 공익 단체와 계약을 맺고  뉴욕 지역의 석유 공급을 서둘렀다.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경우, 75개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빈민 8천여 명이 이번 ‘혜택’의 주요 대상이다.
   
우고 차베스가 미국 빈민에 대한 석유 지원을 통해 얻으려는 속셈은 분명하다. 미국 내에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한편, 반 부시 여론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다.

“9·11 테러 못지 않은 원조 공격” 비난도

차베스 대통령의 이같은 ‘공격적인’ 원조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이는 차베스의 석유 지원 결정을, 지난 2001년 9·11 당시 이슬람 테러 집단에 의해 자행된 세계무역센터 공격에 비유하기도 한다. 미국 백악관측은 이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을 피하고 있다.

‘심기 불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쪽도 있다. 미국 석유산업 조사재단(FIIP) 대표 래리 골드스타인은 '차베스 플랜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차베스는 정책적으로 아주 교활하다.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의 피부 밑까지 파고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와 반대로 ‘시혜 당사자’인 미국 뉴욕 브롱크스 주민들은 차베스의 이번 조처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브롱크스의 한 공익 단체  대표는 '겨울철 기온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겨울은 40만 달러에서 50만 달러를 절약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2월9일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29차 메르코수르 정상 회담에서 베네수엘라는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사사건건 미국에 시비를 걸어왔던 차베스는 더욱 더 기세가 등등해질 법 하다.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의 메르코수르 가입을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로 풀이하고 있다. 회원 가입 과정에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 대통령의 지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 11월 마르델 플라타 아메리카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대리인’으로 통하는 멕시코가 제안했던 아메리카 자유 무역 지대의 설립안은 좌초했다. 메르코수르 회원국과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다. 그 문제로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한 차례 거세게 비난 성명을 주고 받았으며, 서로 자국 대사를 철수하고 교역 관계를 대폭 축소하는 등 양국 관계가 험악해졌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당시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을 ‘제국주의자(즉 미국)의 개’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베네수엘라가 이렇게 미국을 향해 곳곳에서 큰소리칠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다름 아닌 석유다. 막대한 석유 매장량 덕에 베네수엘라의 현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미국만 아니라 라틴 국가 사이에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메르코수르는 그가 이끄는 베네수엘라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새 힘을 얻고 얻었다.

당장 송유관 건설 문제가 탄력을 받게 생겼다. 약 10년 전 역내 무역 활성화와 경제 통합을 목표로 출범한 메르코수르가 베네수엘라-브라질-아르헨티나를 하나로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에 성공하면, 라틴 아메리카의 석유·천연 가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다.

차베스의 ‘미국 요리법’은 의회를 장악해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려는 계획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아예 대선 이슈를 ‘차베스 아니면 부시’로 할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6년 전 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은 대통령 재임 횟수를 1회로 제한하고 있다. 올해 51세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얼마 전 ‘2021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바 있으나, 지금은 아예 ‘2030년 은퇴’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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