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로 올스타팀 너끈하지
  • 양정석 (굿데이E&I 도쿄 특파원) ()
  • 승인 200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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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 70년사 수놓은 명사 ‘수두룩’…현역들도 쟁쟁
 
일본 프로야구 속의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의 흔적을 짚어볼 때면 언제나 작은 흥분이 일곤 한다. 숱한 차별과 냉랭한 시선을 꿋꿋히 딛고 정상에 우뚝 선 그들의 스토리는 적잖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국적을 지켰느냐 일본으로 귀화했느냐를 떠나 근성 넘치는 고독한 사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뜯어보면 한국인의 뜨거운 체온이 곧바로 전해오곤 한다.

일본 프로야구 태동기인 1930년대부터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은 빼놓을 수 없는 화제였다. 숱한 1세대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 중 첫 손가락으로 꼽힐 만한  ‘거목’은 장 훈(65, 일본명 하리모토)이다. 여전히 불멸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는 3천85안타.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약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뒤흔든 장 훈은 타격왕 7차례, ‘베스트 나인’ 16회의 화려한 수상 이력을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 재일교포 선수들이 상당수 귀화한 것에 비해 장 훈은 민족 의식이 투철했던 모친 박남전 여사의 영향으로 끝까지 국적을 지켜 한국의 야구팬들에게도 특별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장 훈은 불의의 화상으로 오른손 세 손가락이 뭉개지는 큰 재난을 당했지만,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핸디캡을 극복하고 끝내 정상에 섰다.

필자는 지난 1999년 한-일 슈퍼게임 당시 일본에서, 2002년에는 한국에서 장 훈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오른손에 화상을 입은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악수를 어느 손으로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던 기억(오른손을 내밀기에 그냥 오른손으로 악수를 했지만)이 있다. 손을 잡는 순간 돌덩이처럼 느껴졌던 굳은살에서 책에서만 봤던 장 훈의 현역 시절 사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1980년 한국 정부로부터 체육 훈장 맹호장을 받은 장 훈은 1990년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요즘은 방송과 스포츠신문의 야구 해설가,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며 아직도 일본 프로야구의 산 증인으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귀화 여부에 상관없이 모국 밝히기 꺼려

재일교포 출신으로 장 훈과 엇비슷한 시기에 일본 야구계에 몸을 담았다가 고국으로 건너와 멋진 활약을 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 OB, 삼성, 빙그레에서 감독을 지낸 김영덕(69)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난카이에서 투수로 활약했고,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사령탑을 거쳐 현재 지바 롯데의 1, 2군 순회 코치로 있는 김성근(63)은 일본 실업팀 소고샤료에서 잠시 뛴 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지도자로서 활짝 꽃을 피웠다. 이들 외에도 김성근과 함께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멤버로 뛰었던 배수찬(1986년 작고)과 일본 실업팀 투수를 거쳐 1993년 쌍방울 감독을 맡았던 신용균(67) 등이 있다.
한국 야구 최고의 사령탑으로 꼽혔던 와세다 대학 출신의 김영조, 실업팀 기린맥주에서 내야수로 뛰었던 전 대한야구협회장 최인철, 니시테쓰와 히로시마에서 투수로 활약했던 한재우 등이 있다.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이름을 떨친 선수 중 귀화한 한국계 스타로는 우완 투수 후지모토 히데오(본명 이팔용)와 좌완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본명 김정일)가 대표적이다. 부산이 고향인 후지모토는 명문 요미우리에 입단, 프로 2년째였던 1943년 59경기에 등판해 34승11패, 방어율 0.73의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34승 중 완봉승이 무려 18차례였다. 후지모토는 1948년 어깨를 다쳐 절망에 빠졌지만 재기를 위한 자기만의 변화구를 개발해 결국 일본인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슬라이더를 던지며 이듬해 24승7패를 올린 ‘오뚝이 부활’로도 유명하다. 또 가네다는 14시즌 연속 20승이라는 믿기지 않는 대기록을 세웠다. 20시즌 동안 400승298패에 통산 방어율 2.34.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록이다. 후지모토는 1976년, 가네다는 198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한국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등장한 교포 선수들도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프로야구가 깃발을 올린 지 2년째인 1983년 삼미 슈퍼스타스로 이적한 너구리 장명부(일본명 후쿠시 아키오)는 독선적인 행동으로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도 입단 첫해 26완투승을 포함, 30승을 거두며 거센 ‘일본 야구 바람’을 일으켰다. 김일융(일본명 니우라 히사오)은 두 번 은퇴라는 이색 기록을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 자이언츠에서 은퇴한 직후인 1984년 한국으로 건너와 삼성 유니폼을 입은 김일융은 첫해 16승에 이어, 두 번째 해 25승을 따냈다. 김일융은 고국에서의 활약으로 일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아 다시 일본으로 유턴해 다이요, 다이에를 거쳐 1993년 야쿠르트에서 진짜 은퇴했다. 결국 고국에 온 덕에 선수 생활을 7년이나 연장하는 행운을 쥐었다.

이밖에도 청보 핀토스와 삼성에서 뛰었던 언더핸드스로 김기태(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스), ‘안방 마님’ 포수의 개념을 바꿔놓은 해태 타이거즈의 김무종(일본명 키모토 시게미), 1989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재일교포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타격왕(타율 3할2푼7리)에 오른 고원부(일본명 요시무라 모토토미) 등도 한국 팬들에게 낯익은 선수다. 1970년부터 14년간 긴테쓰에서 뛴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삼성에서 포수 마스크를 쓴 송일수(일본명 이시야마 카즈히데)는 1983년 일본 은퇴 경기서 프로 첫 홈런을 치는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재일교포는 아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인의 기개를 떨친 백인천(62)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백인천은 1961년 도에이로 스카우트되어 1975년 타격왕에 올랐다. 19년간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전 경기에 나가 타율 4할1푼2리의 신기록을 세웠다.
1936년 일본 프로야구가 닻을 올린 지 어언 70년.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출중한 재일교포 프로야구 스타들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현역으로 뛰는 재일교포 선수들 중 상당수는 귀화 여부에 관계없이 “내 모국은 한국이다”라고 밝히기를 꺼리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2005년 일본 프로야구의 센트럴과 퍼시픽 양 리그 12개팀 가운데 과연 한국계 선수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데이터를 뽑기는 불가능하지만 ‘프로팀 1개는 만들고도 남는다’ ‘한국계 선수만으로도 손색없는 올스타 팀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얘기는 아니다.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에이스로 뛰고 있는 한 우완 투수는 아직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승을 올려 일본 최고의 투수 영예상인 사와무라상까지 거머쥐었던 퍼시픽리그의 최고 투수다. 일본 프로야구의 영웅인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종신 명예감독이 2004년아테네올림픽에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그를 대표로 발탁하고 싶었지만 국적이 걸림돌이 돼 결국 포기한 일도 있다. 니혼햄 파이터즈에서 최고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한 중거리 타자는 줄곧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가 몇 년 전 귀화를 해 최근 대표팀에 발탁됐고, 지난해 메이저리그로 이적한 세이부 출신의 내야수는 미국에서의 입단 기자회견에서 한국계임을 묻는 질문에 ‘노코멘트’로 답한 일화가 있기도 하다.

이들 이외에도 일본 야구팬들 사이에서도 한국계로 널리 알려진 한신의 최고 스타 가네모토 토모아키, 히야마 신지로, 올 시즌 요미우리를 퇴단한 기요하라 가즈히로 등. 오래 전부터 한국 상권이 밀집해 있는 오사카 연고의 한신 타이거즈, 그리고 원폭의 피해지였던 히로시마 연고의 히로시마 카프에 전통적으로 한국계 선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프로 사령탑 출신 중에서는 ‘열혈남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대표적인 한국계로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등 ‘한국 삼총사’가 맹활약을 했던 지난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사령탑을 맡아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화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지만 깊은 정이 넘쳐 많은 선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아시아 야구 종주국을 자부하는 일본에서 아직도 한국계를 제외하고는 얘기가 되지 않을 만큼 재일교포 출신들의 활약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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