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한 과학도 갈지자로 걷는다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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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골렘:과학의 뒷골목> 논쟁의 역사로 본 실험의 사회학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인 골렘은 유대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진흙으로 빚어 유대교 라비의 주문으로 생기를 불어넣은 일종의 인조 인간인 것이다. 골렘은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 충직한 하인 구실을 하지만, 언제라도 미쳐서 난폭하게 날뛸 수 있는 위험스런 존재이기도 하다. 과학사회학을 연구하는 저자들은 과학을 골렘에 비유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 관련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도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듯 싶다가도 어느 순간 큰 물의를 일으키기 쉬운 게 바로 과학이라는 뜻이 아닐지. 

그렇게 잘못되기 쉬운 과학의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파스퇴르는 실험을 통해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린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던 과학자 푸셰는 밀폐된 용기에 담아둔 영양물질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연발생설을 계속 주장할 수 있는 실험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파스퇴르도 그런 실험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실험 과정에서 뭔가 잘못이 있었다면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연발생설을 반박하는 결과가 나온 파스퇴르의 실험에 대한 푸셰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황우석 연구팀 관련 논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제3자, 즉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위원회가 최종적인 판정을 내리게 되었다. 위원회는 파스퇴르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것은 과학아카데미가 진화론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주류 과학계는 자연발생설을 진화론의 근거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판정의 까닭이야 무엇이든 오늘날의 우리는 파스퇴르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판정이 내려질 당시에는, 과학 논쟁의 진위 판단이 순수하게 과학적 실험의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 못지않게 지식의 근거와 과정 따져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찬가지다. 상대성 이론대로라면 시간·질량·길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체의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며, 사람이 빛만큼 빨리 움직인다면 훨씬 천천히 늙어가게 된다. 이 믿기 힘든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영국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일식 때 별의 겉보기 위치 이동을 측정해 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1.7초만큼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증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에딩턴의 연구팀은 두 군데에서 두 종류의 망원경을 사용해 관측을 진행했고, 여기서 나온 값들은 큰 편차를 보였다. 그러나 에딩턴은 상대성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과만을 내세웠다. 1919년 영국왕립천문학회는 에딩턴의 관측 결과를 통해 상대성 이론이 확증되었다고 공표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결정적으로 확증된 것은 언제인가? 1945년, 정확히 말하면 1945년 원자폭탄이 폭발해 가공할 위력을 보여준 때였다. 

초등학교에서 물의 끓는 점 실험을 할 때 학생들이 얻어내는 온도가 섭씨 100도가 아닐 때가 많다는 건 애교(?)에 가까운 일일까? 학교에서의 그런 실험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는 섭씨 100도에서 물이 끓는다는 교사와 교과서의 설명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러나 위의 두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규모 연구비가 투입된 고도로 정밀한 실험이나 관측에서도 사정은 어느 정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동의하기로 동의’함으로써 과학 논쟁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 저자들은 상대성 이론이 그르다거나 자연발생설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이란 애당초 믿을 게 못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배관공이 실수를 한다고 해서 반(反)배관공 운동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들의 목적은 과학의 어두운 구석을 폭로하는 데에도, 과학을 싸잡아 비판하는 데에도 있지 않다. 대신에 과학 활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 과학 논쟁의 구체적인 해결 방식 등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학교 시절 시험 치기 위해 부지런히 외웠다가 졸업하면 영원히 안녕하고 마는 게 과학 지식이라고 볼 때, 문과 머리와 이과 머리가 따로 있다는 통념이 아직도 지배적이라고 볼 때, 과학 지식이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에만 열광하고 그 지식의 근거와 과정을 따져 묻지 않는 태도가 일반적이라고 볼 때, 과학이라는 골렘이 언제 어떻게 우리의 뒤통수를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이충웅 지음, 이제이북스)는 걸 새삼 일깨워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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