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바뀐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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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는 고달사지가 있다. 여주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가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절터다. 지금은 주춧돌과 거대한 석불대좌 등 석조 유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고려 초기에는 우리 나라 3대 선원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달선원이 이곳에 있었다. 현재 정확한 절터 규모와 형식을 파악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름다운 부도탑이 2기 있기 때문이다. 부도탑은 기단부에 귀룡문(龜龍文)이 본격적으로 표현되는 고려시대 부도탑의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일찍 주목되었다. 거대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세련된 장식미를 보여주고 있는 데다가 뛰어난 조각 기법이 남달라, 하나는 국보4호로, 하나는 보물 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된 부도탑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조사되지 않은 채 ‘고달사지 부도’로, 보물로 지정된 부도탑은 977년에 세워진 ‘원종대사혜진탑’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일제 시대인 1933년 일제가 발표한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 기념물 보존령’ 영향이 크다고 판단된다. 일제는 당시 ‘경성 남대문’은 보물 1호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은 보물 14호로, ‘고달사지 부도’는 보물 15호로 지정했다. 일제 시대에 최초로 우리 나라 문화재를 전면 조사를 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국건축조사보고>를 쓴 세키노 다타시 등이 조사한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명칭이 광복 이후 별다른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그 명칭 그대로 오늘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최근 고미술계에서는 이들 탑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석조문화재 전문가인 국립고궁박물관 소재구 관장이 ‘부도탑 주인이 서로 바뀌었다’고 주장한 사실이 고미술업계 전문지인 <고미술 저널>의 보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소관장이 처음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을 때인 1993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이 내는 <미술자료> 52호에 ‘고달사지 승탑편년의 재고’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다. 소관장은 승탑(부도탑)은 탑비와 짝을 이루어 제작하는 것이 상식인 만큼 비문에 조성 연대가 확실하게 기록된 원종대사혜진탑비와 비교해 두 부도탑 가운데 어느 것이 원종대사혜진탑인지를 밝히는 방법으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일제 시대 지정한 명칭 그대로 사용

소관장은 지난 11월2일 “내 주장이 공개된 이후 학계에서 이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검증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하루빨리 오류를 바로잡아 이 승탑을 바탕으로 조각이나 문양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관장의 문제 제기 이전에도 이미 이런 주장이 몇 번 제기되었다. 사학가 정해창씨가 1962년 6월 한국사학회가 발행하는 <사학연구> 13집에 ‘고달사지의 부도와 비부(碑趺)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여주군이 1984년 펴낸 ‘고달선원지의 지표조사보고서’에서도 고달사지부도가 원종대사혜진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두 주장이 약간 차이는 있지만, 고달사지부도가 원종대사혜진탑이기 때문에 주인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현장을 가본 결과 이들의 문제 제기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소관장의 주장을 계기로 이제는 이에 대한 정확한 고증 조사를 통해 분명한 결론을 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존재했다는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주도하면서 고달사를 흡수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련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최소한 조선 초기까지는 이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쳐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소관장에 따르면, 고달사와 인연을 맺은 고승들(원감대사·홍각선사·진경대사·원종대사 등) 가운데 유일하게 원감대사만이 부도탑과 탑비가 없다. 신라 9산 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을 연 원감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실상사를 거쳐 29년 간이나 고달사에 머무르다가 868년 입적했다.

두 부도탑 중대석의 거북모양 확연히 달라

958년 입적한 원종대사는 고려 태조가 죽자 장례를 집전했으며, 광종이 그를 국사로 책봉하는 등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름을 떨친 고승이었다. 고달사를 크게 빛낸 선승이 원감·원종대사 두 사람이라는 점에서 현재 고달사지에 있는 두 부도탑의 주인공이 원종대사와 원감대사일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추론이 아니다.

산기슭에 있는 이들 부도탑과 떨어져 고달사지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에는 이 비석의 주인공이 원종대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같은 해(977년)에 부도탑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관장은 원종대사 것이 확실한 탑비와 두 부도탑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원종대사 부도탑인지를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자형의 굵은 눈썹을 가진 거북이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옆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물갈퀴 같은 지느러미와 수염털 장식이 보인다. 거북 등은 세 겹 무늬로 되어 있고 발톱은 겹주름 모양, 구름 모양은 비운문(飛雲文·구름이 날아가는 모양의 무늬)이 강조되었다.

이런 특징은 원종대사혜진탑보다 고달사지부도에서 두드러진다. 일단 두 부도탑 중대석에 있는 거북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원종대사혜진탑에서는 거북 머리가 옆으로 돌아간 반면, 고달사지부도에서는 정면을 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톱 주름이 홑주름이고, 거북 등 무늬가 한 줄로 되어 있으며, 구름 모양 또한 다르다.

소관장은 “원종대사혜진탑비와 원종대사혜진탑을 비교해보면 조형 양식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원종대사혜진탑비에서 보이는 특징이 그대로 고달사지부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두 작품은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관장은 또 신라 말인 9세기 중엽부터 고려 초인 11세기 초까지 주인공이 확실한 부도탑과 탑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현 원종대사혜진탑은 늦어도 890년 이전에 조성된 신라 시대 부도탑이라고 판단했다. 주인공이 원종대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원종대사혜진탑은 고달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데다가 짜임새 있고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반면 고달사지부도의 경우 옥개석과 상륜부의 조형성이 뒤져 있고, 과장된 형태, 느슨한 곡선을 이루는 지붕의 물매 등 고려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소관장의 문제 제기는 매우 구체적이다. 풍부한 자료 조사와 현장 검증을 거친 뒤에 내놓은 주장이다. 그러나 이후 이와 관련한 정밀 조사나 논의가 관련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적은 없다. 이것은 그의 문제 제기가 설득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 분야 전문가가 많지 않고, 인맥과 학연 등으로 얽혀 있는 풍토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지정한 원로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도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고미술 전문가 김호년씨는 “이 문제는 단순히 명칭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국보와 보물이 바뀔 수도 있고, 연구자들이 시대의 조형 양식 등을 연구하는 데 많은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조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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