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끝이야 이제부터 ‘오라이’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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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현지 르포/6자회담 타결 후 ‘가속 페달’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광화문을 출발한 버스가 자유로에 진입해 일산~문산을 거쳐 도라산역 인근에 있는 남한 출입국관리소(CIQ)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20분. 이곳에서 입국 심사를 받고 개성공단(황해북도 개성시 봉동리)에 도착하기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렸을 뿐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꽝꽝 얼어붙어 도로가 미끄럽고, 중간에 다시 얼굴이 파랗게 언 북한 군인들의 검문 검색을 받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그렇지 본래는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도라산역~개성공단 간 거리는 8km 남짓하다). 개성이 초행길인 사람들의 표정에 ‘이거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거 아냐?’ 하는 당혹감이 스쳐갈 정도였다. 

이렇게 도착한 개성공단의 첫인상은 허허벌판 그 자체였다. 1단계 개발 계획이 진행 중인 백만 평 너른 땅에 부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니 그럴 만도 했다(조감도 참조). 영하 7도를 밑도는 추운 겨울 아침임에도 대형 트럭들은 분주하게 공사장을 오가고 있었다. 이들 트럭은 한결같이 번호판을 가리고 사이드미러 바로 위에 붉은 깃발을 꽂은 모습이었다. 남북간 합의 규정에 따라 남측 공사 차량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멀리는 대형 포클레인 십여 대가 산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허허벌판 초입에 시범단지(2만8천 평)가 있었다. 100만 평 드넓은 공사 터에 씨눈처럼 야무지게 박혀 있는 이 시범단지에는 2005년 12월 말 현재 15개 기업이 입주해 있었다. 이 중 공장을 건설 중인 3개 기업을 제외한 12개 기업은 이미 공장을 풀 가동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들 기업은 현재 북한 사람 5천4백여 명을 포함, 6천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버스가 기자 일행을 내려준 곳은 시범단지 입구. 이곳에 내려서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탤런트 현 빈·김태희의 대형 사진을 전면에 내건 신원 공장 건물이었다. 개성공단 한복판에서 뜻밖에 마주친 이 선남선녀의 사진은 북한 땅을 처음 밟은 데서 오는 남한 사람들의 긴장감을 누그려뜨려 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원(회장 박성철)은 시범단지 입주 기업 중에서도 가장 알찬 한 해를 보냈다. 지난 5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패션쇼를 개성공단에서 처음 여는 것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신원은 증권선물거래소의 연말 집계 결과 2005년 한 해 주가 상승률이 가장 높은 상장사 5위에 꼽히는 경사를 맞았다. 2004년 말 2천2백65원 수준이었던 신원 주가는 1년 만에 1만8천7백원으로 훌쩍 뛰었다(상승률 725.61%). 9월 6자회담 타결 이후 ‘남북 경협 테마주’로서의 이점을 톡톡히 누린 셈이었다.

사실 6자회담 타결은 시범단지 입주 기업들에게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현대와 북측이 개성공단을 개발하기로 공식 합의한 것이 2000년 8월. 그로부터 5년이 지나도록 공단 개발에는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최초의 ‘메이드 인 개성’ 제품인 리빙아트산 냄비(일명 개성냄비)가 생산되기 시작한 2004년 12월 이후에도 극적인 진전은 없었다. 한반도 주변 상황이 워낙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자회담, 아니 엄밀하게는 그 직전 개최된 10차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2005년 7월)에서부터 남북 경협은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의 2006년이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획대로라면 올해는 본단지 입주가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첫해이다. 오는 연말께면 1단계 공장 개발 부지 100만 평 중 5만 평에 대한 입주가 완료될 것이라고 한국토지공사측은 전했다. 현재 이곳 5만 평에는 좋은사람들 등 5: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된 중소 기업 18개가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공단 개발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범단지는 사실상 ‘시련 단지’나 다름없었다고 (주)태성산업 배해동 대표는 말했다. 내수·수출용 화장품 용기를 생산하는 이 업체는 2005년 10월 개성공단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두 달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시범단지에 입주 신청을 할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배대표는 푸념했다.

올해 입주 예정 기업 18개…경쟁률 5대 1

당장은 통신이 문제였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조차 쓰기 힘든 것이 이곳 사정이었다. 남북간 전화선이 개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주 업체들은 제3국을 거쳐 비싼 국제전화 요금을 물어가며 남한 본사나 바이어와 전화 접촉을 하곤 했다. 그나마 회선도 귀했다. “전화 없이 영업을 한다는 게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이냐”라고 배대표는 되물었다. 이런 불편은 12월28일 KT가 개성공단에 전화국을 세우고 직통 전화를 개설하면서 비로소 해소됐다.

그 밖에도 시련은 예상치 않은 데서 불거져 나오곤 했다. 기능성 신발 제조 업체인 (주)삼덕통상에서 기자가 문창섭 대표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한 직원이 사장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단수로 인해 북측 종업원들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만큼 단축 근무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단수 원인부터 파악하라고 지시한 문대표는 ‘우리는 실험용 사업가’라며 웃었다. 개성공단에 입주해 처음 맞는 겨울, 언제 어디서 어떤 돌발 사고가 일어날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개성공단에 대해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처음에는 개성에 오지 않으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입주를 신청했다. 그러나 지금은 실질적인 자신감이 생겼다”라고 문창섭 대표는 말했다.

부산 신발지식조합 이사장으로 김해공항 인근 녹산공단에 본사를 갖고 있는 문대표는 신발 산업 메카로 이름난 부산의 옛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선발대가 된다는 심정으로 개성 진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중국 칭다오에도 공장을 갖고 있는 문대표는 “중국에도 지난 4년간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사정이 개성만 못한 것 같다”라며 앞으로는 중국 공장 규모를 줄이고 개성 공장을 더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이 일단 그를 만족시킨 것은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이었다. 

현재 시범단지 입주 업체 중 북한 인력(1천1백여 명)을 가장 많이 채용하고 있는 문대표는 “말이 안 통해 답답한 중국 노동자와는 다르다. 더욱이 북측 노동자는 대부분 고등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으로 마쳐 지적 수준이 상당한 데다 학습 열의까지 대단하다”라고 평했다. 덕분에 입주 초기에만 해도 2개월씩 걸리던 신입사원 교육 기간이 최근에는 3주로 단축되었다는 것이다.

 
태성산업 배해동 대표는 이렇게 교육시킨 인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개성공단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국내 공장에서 뽑아 쓰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1~2년 걸려 숙련공으로 훈련을 시켜도 체류 기간 제한에 걸려 다시 내보내야 하는 만큼 비용이 계속 발생한다. 반면 북측 노동자는 북한 당국이 알아서 관리해 주므로 그럴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임금 인상 압박 없이 이들을 계속 부릴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개성공단의 평균 월급 수준은 57.5달러(최저 임금 50달러+사회보험료 7.5달러). 이것만으로도 중국·베트남 등지와 비교해 조건이 좋은 편인데, 개성공단은 연간 임금 인상률이 5% 미만으로 제한돼 있기까지 하다. 기업가들에게는 지상낙원인 셈이다. 

하이테크 업체도 북한 우수 인력에 ‘매료’

배해동 대표는 기술 유출 우려가 거의 없다는 점 또한 개성공단의 매력으로 꼽았다.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한 화장품 업체들의 경우 몇 년 못 가 자신들의 기술을 베낀 중국 기업 때문에 도산한 사례도 많았다고 그는 말했다. 한 예로 화장품 브러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한국산이 중국산에 밀린 것 또한 이같은 기술 유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개성공단에는 아직 약점도 많다. 통신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통신과 더불어 이른바 3통 문제로 불리던 통행·통관의 문제는 아직 완전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인터뷰 기사 참조). 

원산지 표기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메이드 인 개성’으로 상징되는 북한산 제품의 경우 미국이나 일본, EU 수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 차원에서 북한산 제품에 대해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입주 업체들은 개성에서 반제품 상태로 만든 물건을 남한 본사에 보내 완제품으로 재가공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고 있다. 그래야만 ‘메이드 인 코리아’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제나르 협정 등에 따른 이른바 전략 물자 반출 금지 조항 또한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전략 물자란 전시 금수 품목에 기원을 둔 개념으로, 적성국 또는 준적성국에 이전될 경우 군수용 물자로 전용되어 자국에 위해를 가할 수 있기에 자유로운 무역 거래를 제한하는 품목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최신형 컴퓨터도 반입 금지 대상이다.

반도체 부품 용기를 주로 생산하는 (주)SJ테크 유창근 대표는 이로 인해 첨단 설비나 교육 기자재를 들여오는 데 한계가 있어 종업원 교육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아직은 높지 않은 것 또한 개성공단의 제약점이다. 입주 업체들은 이들의 생산성을 남한 노동자의 70% 수준으로 보고 있다. 삼덕통상 문창섭 대표는 “북한 사람들의 손재주가 뛰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불량률이 남한에 비해 높고, 조장·반장 등 북측 관리자들의 산업 현장 장악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듯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이들 입주 기업은 개성공단에서 꿈을 하나씩 실현해 가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통해 경직돼 있던 남북 경협의 틀을 완화해 나가는 중이다. 시범단지 입주 업체 중 최초로 주야 2교대 근무제를 도입한 태성산업 배해동 대표는 “처음 2교대를 실시한다고 했을 때 난리가 났다. 하루 8시간 근무에 익숙한 사회주의 체제 사람들로서는 2교대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2교대 실시 이후 야간 근무 수당까지 합쳐 최고 1백50달러를 받는 종업원이 생겨나면서 사정은 180도 바뀌었다. 저녁 밥까지 무료로 제공하니 야간 근무를 자원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 2교대가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북측의 한 근로 여성은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 버스가 개성까지 다 실어다 줍네다”라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이 와중에 태성산업은 일본인 기술자 2명을 개성공단에 상주시키는 모험도 감행했다. 일본을 ‘백년숙적’이라며 원수로 취급해 온 북한에서는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사건이다.

하이테크 관련 업종이면서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도 있다. 앞서의 SJ테크 같은 데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 유창근 대표는 “개성공단에서는 의류·신발 공장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초기 3~5년 정도는 이런 노동 집약형 업체가 유리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기술 복합형 업체가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SJ테크는 전체 북한 인력의 80% 이상을 대졸 출신으로 뽑고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김일성종합대학·김책공대 등 명문대를 나왔다고 밝혔다.

비유하자면 개성공단은 이제 배반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개성공단이 상징적 차원을 넘어 가시적 성과를 내는 단계에 진입하면서 2005년 남북 교역 규모는 사상 최초로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2006년은 이를 통일의 줄기세포로 제대로 키워갈 수 있을지 가늠하는 원년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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