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성 회복’ 위해 <창비>는 변신 중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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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맞아 사람·지면 혁신…문학란 대폭 늘려

 
사람으로 치면,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자기 색깔을 드디어 갖출만한 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같이 견줄 일은 아니지만, 잡지의 경우라면 어떨까.

계간 <창작과비평>(창비)이 올해 1월로 창간 40년을 맞았다. 그런데 불혹을 맞아 창비는 대대적으로 변신 중이다. 우선 주간이 바뀌었다. 지난 10년간 주간 일을 보던 문학 평론가 최원식 교수(인하대·국문학)가 비상임 편집위원으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백영서 교수(연세대·동양사)가 이어받았다. 백영서 신임 주간은 역사학자다. 백낙청·염무웅·최원식으로 이어오던, 문학 평론가들이 편집의 실무책임을 맡던 오랜 전통이 무너졌다.

지면도 대대적으로 변한다. 우선 오는 2월말 발간되는 2006년 봄호부터 표지 상단을 차지하는 묵직한 한줄 제호가 두 줄짜리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뀐다. 도전 인터뷰 같은 논쟁적인 읽을거리 꼭지가 설치된다. 한동안 축소되었던 문학 지면은 대폭 늘어난다. 창비 특유의 담론을 쏟아내던 사회과학 논문도 기존 100매 내외의 긴 분량 대신 70매를 넘지 않는 선으로 짧아진다.

창비 ‘인력 풀’ 세교연구소 출범

이런 것이 형식적인 변화라면, 내용 면에서도 변화의 진폭이 상당할 듯하다. 지금 창비 홈페이지에 가보면 백낙청 편집인의 신년사를 볼 수 있다. <6·15 시대의 대한민국>이라는 글에서 그는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새로운 조어를 선보였다. 한반도 문제의 해법은 남북관계라는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온건과 급진 세력의 대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해 박정희 재평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백씨가 당시의 문제의식을 한층 진전시켜 내놓은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담론 생성의 전진기지라는 기존 창비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다양한 계층을 포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창비는 나아가 백영서 주간이 취임함에 따라, 그의 지론이기도 한 동아시아 진보 지식인 네트워크 등 국제화 작업에도 속도를 낼 방침이다. 조만간 창비 일본어판과 중국어판이 온라인상으로 선보인다. 6월에는 일본의 <세카이(世界)>, 중국의 <두수(讀書)>, 한국의 <황해문화> <녹색평론> 등 비슷한 색깔의 비판적 정론지 편집자들을 초청해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 또한 이들 잡지들과 원고를 교류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40주년을 맞아 창비가 내놓은 가장 큰 뉴스거리는 세교연구소의 출범이다. 1월6일 공식 출범한 세교연구소는 형식상 창비와 독립된 사단법인이다. 사무실도 서울 서교동에 따로 마련했다(작지만 정교한 다리라는 뜻의 세교(細橋)는 서교동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연구소는 사실상 창비 편집위원들의 공부 모임을 확대한 모임이다.

26명에 달하는 창비 편집위원들은 지금까지 한 달에 두 번씩 모이는 공부 모임을 유지해 왔다. 발제자가 논문을 발표하면 이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발표되고 토론된 논문들은 창비 지면에 실렸다. 최원식씨가 이사장을 맡은 세교연구소에는 기존의 창비 편집위원들 외에 고형렬(시인) 김연수(소설가) 김영찬(문학 평론가) 윤정숙(여성운동가) 이기호(평화운동가) 정도상(소설가) 차미령(문학 평론가) 씨 등 문학과 사회과학, 사회운동 쪽 인사들이 새로 참여했다. 백영서 주간은 “창비의 인력 풀을 확대한다는 의미가 있겠고, 또 창비 지면에 실리는 특집만으로는 한국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에서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틀이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지면 혁신과 세교연구소 출범을 비롯한 창비의 쇄신 일정은 지난해 가을부터 내부에서 진행된 대대적인 토론 과정의 산물이다.

<창비>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도 편집인이었던 백낙청 교수는 1966년 1월 <창작과비평>(1966년 겨울호) 창간호에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글을 실었다. 백씨는 이 글에서 당시의 순수문학을 맹타하면서 “한국문학은 단순히 한국의 문학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남북의 절단에 대한 생생한 항의가 되며 역사적 운명 공동체인 한국민족의 가장 애타는 소망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백씨의 문학관은 나중에 민족문학론으로 구체화되었고, 최근까지 한국의 진보적인 문학 경향을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창비의 역사는 그 자체로 민족문학과 지식인운동의 수난사이기도 했다. 1975년 봄호에 실린 <빈 산> <1974년 1월> 등 김지하의 시와 백낙청이 쓴 <민족문학의 현단계>가 문제되어 잡지가 판매 금지되었다. 1977년에는 창비 신서로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낸 직후 편역자 리영희 교수와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연행되었고, 리교수가 구속되었다. 1980년 7월에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도 했다. 창비는 1988년 복간된 이후 지금까지 130호가 발간되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 백낙청 교수는 문학 평론보다 분단 체제론 등 사회 담론 제시에 열중했고, 창비 또한 문학 계간지보다는 종합지적인 면모에서 강점을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창비의 고민도 쌓여갔다. 시대가 바뀌면서 창비 문학 지면을 지탱하던 민족문학 작품들이 활력을 잃고, 창비 색깔과는 다른 문인들의 작품이 지면에 하나 둘 등장했다. 생생하고 논쟁적인 비평이 실리던 자리에는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 들어찼다. 사회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지난해 가을 황우석 교수의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생명 윤리 문제를 다루는 특집을 기획했다가 포기한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러면서 편집위원 내부에서 정체성 위기를 토로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창비 내부에서 혁신을 위한 내부 토론이 벌어진 것은 이 같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물이 이번 창비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백영서 주간은 변화의 핵심을 ‘운동성 회복’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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