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와 매파, ‘배짱’이 맞았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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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법 시효 연장·평양 압박 노리고 ‘북한 범죄 국가론’ 퍼뜨려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 범죄 국가론’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 주장의 골자는 북한 당국이 국가 차원에서 달러의 위조는 물론, 마약 밀수 등 온갖 범죄 행위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 국가론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11월 중순께였다. 우선 미국의 전 국무부 북한 실무 그룹 조정관이었던 데이비드 에셔가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 무렵 미국 워싱턴 윌슨센터에서 가진 한 공개 강연회에서 ‘북한 범죄 국가론’을 들고 나왔다.

‘북한은 지난 2003년에만 최소한 8억3천5백만 달러의 무역 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1천2백 달러에 달하는 외채도 갚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평양 등 대도시에는 외제 물건이 갑자기 넘쳐나고 있다. 왜 그런가. 마약 특히 헤로인과 메타암페타민 등 약물을 밀거래해 벌어들인 돈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북한은 다른 나라 화폐(달러를 지칭)를 위조해왔는데, 이는 국제법에 따르면 전쟁의 사유가 되고도 남는다.’ 당시 그가 행한 강연의 요지다.

데이비드 에셔가 ‘범죄 국가론’을 제기한 앞뒤로 미국 국무부·재무부 등의 고위 관리와 주한 미국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 등도 가세했다. 이들에 의해 범죄 국가론이 재탕·삼탕되며 지난해 12월 들어 본격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12월9일 미국 국무부의 로버트 조지프 군축 담당 차관이 미국 버지니아 대학 밀러센터를 찾아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대책에 대해 연설했다. 이때 그는 ‘외교적 수단’ ‘국방 수단’과 함께 ‘경제적 수단’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북한을 실례로 끼워 넣었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9월 미국 재무부는 위폐와 마약 밀거래 대금의 세탁을 도왔다는 이유로 마카오의 한 은행(뱅코델타아시아)에 대해 거래를 동결시킨 바 있다. 조지프 차관은 이를 보기로 들며 ‘WMD 확산과의 전쟁은 이런 식으로 금융 수단을 통해서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북한 제재할 만한 결정적 증거 제시 못해

북한 범죄 국가론의 근거가 된 지난해 9월의 뱅코델타아시아에 대한 미국 재무부의 금융 조처 소식은 지난해 9월20일자로 발간된 <연방 기록부(Federal Register)>에 그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뱅코델타아시아가 북한 당국의 ‘검은 돈’을 세탁하는 창구 구실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연방 기록부>에 언급된 ‘북한 범죄 행위’는 가장 최근의 것이라고 해봐야 2004년 12월 터키 당국에 의해 두 명의 북한 외교관이 불범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더욱이 뱅코델타아시아가 북한 당국과 계속 협력해왔음을 입증하는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증거는 이번에도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이 은행의 고객인 북한의 한 유명한 기업(조광무역 지칭)’이 10년 이상 위조 지폐 유포 따위 수많은 불법 행위를 저질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기업은 국제 마약 거래에도 연루된 것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다’는 것이 전부였다.

북한이 ‘범죄 행위로 벌어들인다’는 수입 규모 또한 ‘추정치’에 불과하다. 데이비드 에셔 등 이른바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기정 사실화’한, 북한이 불법 행위로 벌어들이는 수입 규모는 ‘5억 달러’이다. 이 중 마약 밀수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연간 1억~2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원래 이 액수는 지난해 3월 미국 의회의 의회 조사국이 작성한 북한 마약 실태에 관한 보고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를 북한의 불법 행위를 거론할 때 논자들이 너도나도 즐겨 인용하면서 자가 발전되어 마치 확정적 사실인 양 여겨지게 된 것이다.

 
북한 당국이 최근까지도 마약 거래 등 범죄 행위에 가담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범죄 행위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확실하게 크게 늘어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거나, 강력한 제재 조처를 취해야 할 결정적인 증거는 미국 당국이나, 언론이 제시하지 못한 상태다.

미국 정부는, 정확히 말해 미국 행정부 내 강경파들은 왜 북한의 ‘범죄 행위’에 새삼 눈길을 돌리고 있는가. 일부 관측통들은 북한의 범죄 행위가 미국에서 현재 ‘시효 연장’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고 있는 ‘애국법’과 밀접하게 연동되었기 때문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 범죄 국가론 파장이 증폭되는 시점과 애국법 시효 연장을 둘러싼 미국 여야 또는 행정부와 의회의 힘겨루기가 치열해지는 시점이 묘하게 일치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애국법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1기 부시 정부가 테러 방지를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하지만 인신 구속이나 계좌 추적을 강화해 제정 이후 줄곧 ‘인권 침해’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연말 시효 만료가 다가오면서 이 법의 존폐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또 한번 불이 붙었다. 이 중 ‘북한 범죄’와 관련된 부분은, 특정 금융 기관이 테러 집단의 돈 세탁 창구로 확인될 경우 행정 당국이 금융 제재 등 ‘특별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애국법 시효를 연장하고 싶어 하는 부시 정부에 ‘북한 사례’는 분위기 조성에 더없이 좋은 명분을 제공해준다. 애국법 논란은 지난해 연말 진통 끝에 상원의 결정 때까지 일단 ‘50일간’ 연장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이 법에 대한 상원의 결정은 오는 2월에 있을 예정이다.

일부 관측통들은 미국이 북한 범죄 국가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대북 협상파에 대한 견제는 물론 경제적으로 북한을 한층 더 압박하려는 미국 내 강경파의 의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북한 봉쇄론’ 또는 ‘북한 정권 교체론’의 차원에서 북한 범죄 국가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범죄 국가론, 핵 협상에 악영향 끼쳐

지난해 12월 말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반도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북한 범죄 국가론의 확산은 미국 딕 체니 부통령실과 미국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으로 이어지는 대북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이는 북한 핵 문제가 정권 교체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거번 맥코맥 교수(역사학)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00~00쪽 기고 참조).

이런 분석은 북한 범죄 행위가 다시금 터져나온 시점을 살펴보면 더욱 힘을 얻는다. 북한 핵 협상에 중대 진전이 있었던 협상 당사국들 대부분이 환호에 젖어 있던 지난해 9월의 중국 베이징 6자 회담 직후, 월스트리트 보도를 통해 터져 나왔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그 뒤 이 문제는 미국의 강경파들 사이에 주거니 받거니 계속되면서 지난해 연말 절정에 올랐던 것이다.

북한의 달러 위조·마약 밀수 따위 범죄 행위는 북한 인권 문제와 함께 미국 강경파들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카드라는 인상이 짙다. 하지만 이 카드를 후속 6자 회담을 앞둔 최근 시점에서 새삼 흔들어대는 데 대해 미국인들조차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안보 보좌관을 지낸 새뮤얼 버거는 최근 서울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 ‘안보 문제라는 최고 중대사를 해결하려면, 다른 문제를 확대시킬 것이 아니라 6회 회담에 집중할 때’라며 현 미국 외교 당국을 비판했다(00쪽 관련 기사 참조). 현 시점의 북한 범죄 국가론은 핵 협상을 위태롭게 만들어, 한마디로 백해무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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