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달러와 함께 쓰러지나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1.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달러 환율이 폭락하는 등 달러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달러 체제 붕괴→미국 경제 몰락’ 시나리오는 현실이 될 것인가.
 
2009년 2월21일 오전 11시 일본 도쿄 오쿠라쇼(재무성)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일본 달러 보유액이 2조 달러를 넘어서면서 오쿠라쇼가 달러를 팔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 도쿄 나가타초의 총리 관저에서 열린 비상 각료회의가 오쿠라쇼 결정을 추인하자 이로써 세계 경제는 달러라는 주요 버팀목을 잃어버렸다. 달러라는 기축통화가 세계 경제를 뒷받침해왔던 것이다.

중국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 나가타초가 환율 시스템을 유로화와 기타 통화 바스켓 방식으로 바꾼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즉각 중국 정부는 베이징 중난하이(주석 관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 중국 정부는 두 가지 중대 결정을 내렸다. 일본처럼 보유 달러를 매각해 유로화 비중을 늘리기로 하고 달러 가치에 고정시킨 홍콩 달러의 환율 시스템도 포기했다.

 
같은 날 오전 10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도 비상하게 돌아간다. OPEC 회원국 대표자들은 긴급 회의를 열고 유로·엔·달러·위안으로 구성된 통화 바스켓에 의거해 유가를 책정하도록 지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조처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원유 생산국의 자산과 구매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다.

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3·4위 달러 보유 국가인 타이완과 한국까지도 달러 매각 대열에 동참했다. 한국은행은 같은 날 오후 1시 통화신용정책의 최고 의결 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비상 전체회의를 열고 3천억 달러나 되는 외환 보유고에서 유로화 비중을 50%까지 늘리기로 결의했다. 아시아 국가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싱가포르에서 긴급회의를 갖기로 합의했다. 아시아 지역 공동 화폐로 ‘아쿠(ACU·Asian Currency Unit)’를 채택하기 위해서다.

세계 경제 구조적 취약성이 달러 추락 부채질

2월22일 새벽 4시 미국 워싱턴 백악관. 미국 대통령은 재무장관으로부터 외환 시장 동향을 보고받는다. 그런데 그는 달러 투매 사태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단했다. 전세계 국가들이 자국 수출 산업을 지키려면 달러를 방어해야 하고 또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그들이 갖고 있는 미국 국채 가치도 떨어져 큰 손실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무장관은 대통령과 생각이 달랐다. 중국과 인도가 미국을 대체할 시장으로 성장했고 미국 제조업이 붕괴하면서 아시아 국가 제품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임을 감안하면 다른 나라들이 ‘달러 포기’로 인한 손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재무장관은 달러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려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제조업체를 다시 유치해 미국 본토에 생산 시스템을 재가동하고 수입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야 무역수지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의회는 세금 올리기에 실패한다. 제조업 유치 실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자 급기야 환율이 1달러 대 0.5유로와 50엔까지 폭락하고 만다.

달러 가치가 폭락하자 미국 기업들이 거센 후폭풍에 휘말린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 보잉은 기업 가치가 크게 떨어져 유럽 에어버스에 인수되는 신세가 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중국 소프트웨어 업체에 합병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국제통화기금(IMF) 본부도 워싱턴에서 벨기에 브뤼셀로 옮겨지고 유로 경제는 미국 경제의 두 배까지 성장한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세계 경제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 경제전략연구소(ESI)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 소장이 펴낸 <부와 권력의 대이동(3 billion new capitalists)>을 기초로 재구성한 ‘미국 경제 붕괴 시나리오’다. 얼른 보면 허황되게 들리는 이 시나리오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미국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이 크게 나빠지면서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이 과거 어느 때보다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은 1월2일 1천8원이었으나 1월9일 9백77.5원까지 폭락했다. 일주일 만에 30원 넘게 떨어졌다. 오석태 씨티은행 경제분석팀장은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백14엔(1월11일 기준) 수준이나 올해 연말 98엔까지 떨어지고 1유로에 1.2달러인 유로/달러 환율은 1.38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미국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달러 약세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라고 말했다.

최근의 달러 가치 급락은 외환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빚어낸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세계 경제 질서가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전세계 인구의 5%밖에 되지 않는 미국 국민은 전세계 소비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흥청망청 써대고 있다. 미국 저축률은 0%에 가깝다. 올해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6천6백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미국 연방 정부가 떠안고 있는 총부채 규모는 8조5천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67.3%나 된다. 의회예산국은 총부채 규모가 2009년 10조 달러를 돌파하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지난해 3천2백억 달러에 육박했다. 국내총생산의 2.6%나 되는 것이다.

경제 분석가 리처드 던컨은 <달러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세계 통화 체제가 안고 있는 결점들이 세계 경제의 국제수지 불균형 상태를 초래했다. 조만간 달러는 붕괴하고, 세계 경제는 심각한 침체에 빠질 위험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던컨이 제기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달러 가치 폭락 → 달러 표시 자산 매각 → 달러 체제 붕괴 → 금융 혼란 → 미국 경제 붕괴 → 세계 경제 몰락’이라는 연쇄 작용이다.

 
이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국제 사회가 달러 하락 사태를 연착륙시키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그저 협력해서는 달러 위기의 불길을 끌 수 없고 ‘철저하게’해야 한다. 아니면 대안이 될 기축통화를 찾아야 한다. 달러 투매를 자제해 달러가 평가 절하하는 속도를 세계 금융 시장이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늦추어야 한다. 또 늘 해왔던 대로 대미 무역 수지가 흑자를 기록한 국가들이 미국 내 자산이나 재무부 채권을 사주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해주어야 한다.

기축통화 바꾸기도 쉽지 않아

다른 대안인 새 기축통화 찾기는? 이론적으로만 보면, 1944년 달러가 영국 파운드를 보기 좋게 제치고 세계 통화라는 지위를 차지했듯이 새 기축통화가 달러를 대체한다면 세계 경제의 공멸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기축통화의 교체는 세계 경제의 주도권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특정 강대국이나 경제 블록이 경제력·군사력·외교력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비롯한 경쟁 국가를 압도할 수 있어야 별 혼란 없이 세계 경제 체제의 틀을 다시 짤 수 있다. 2020년까지 달러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나오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부속 기사 참조).

대우증권 홍성국 투자분석부 부장은 “(달러 가치의) 경착륙은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1930년대 대공황에 필적할 만한 극심한 혼란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미국의 경착륙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처를 강구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또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1990년 이후 대외준비자산에서 차지하는 달러의 비중을 꾸준히 높여왔다는 점에서 달러 가치 폭락은 재앙에 가까운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출을 앞세운 성장 전략을 채택한 개발도상국들도 성장의 문턱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일본·중국·타이완·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현재 2조6천억 달러가 넘는다. 달러 가치가 10% 떨어지면 2천6백억 달러가 공중으로 사라진다. 아시아 4개국 중앙 은행들이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함에 따라 입게 될 손실을 줄이기 위해 미국 채권과 달러를 팔고 유로나 엔으로 바꾸면 달러 가치는 곤두박질할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은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자국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외환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여 달러 가치를 떠받쳐 왔다. 그러다 보니 달러 표시 자산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달러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사실 달러를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처지에 내몰려 있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고 있는 아시아의 투자가 중단되었을 때 세계 경제에 재앙이 야기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중앙 은행들이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 위주 성장정책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는 수출이 늘어 해마다 무역 흑자액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직접 투자의 블랙홀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세계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일본·타이완에는 주식 시장이 활황을 맞으면서 유동성이 강한 세계 뭉칫돈이 몰려들고 있다.

중국·일본·한국·타이완을 비롯해 외환 보유고가 엄청나게 높은 국가들이 달러를 팔고 유로나 엔으로 바꾼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달러가 기축통화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기축통화 달러의 운명은 아시아 무역 강국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 금융 시장에 일대 혼란을 야기할 기축통화 교체를 감행할 것인가? 국제 정치 역학이라는 변수가 개입할 여지가 있어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으로만 해석하면 국제 준비 통화로서 달러가 매력을 잃은 것은 틀림없다.

한국·중국, ‘일본식 불황’ 맞을 위험

수년 간 미국 경제는 악화일로를 치달았지만,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FRB는 미국 경기가 과열 기미를 보이자 지난해 12월13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연방기금금리를 4.25%로 인상했다. 지난 2004년 6월 이후 무려 13차례나 거푸 미국 기준 금리를 올려 2001년 4월 이후 4년 반 만에 최고 수준으로 높였다. 미국 금리가 올라가자 세계 투자은행들이 달러 표시 자산 비중을 높였고 그 결과 달러 가치 강세로 이어졌다. 하지만 FRB는 발표문에 그동안 사용했던 ‘경기확장적(accommodative)’라는 말을 삭제해 금리인상 행진이 마무리되었음을 시사했다.

 
미국 기준금리가 상승할 가능성이 없어지면 국제 금융 시장에서 어떤 상황이 빚어질까. 달러 가치 하락을 피할 수 없다. 달러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면 해외 투자자들은 더욱 미국 자산을 팔아치우려 들것이고 미국 주식 시장에서 한사코 이탈하려할 것이다. 투자 이탈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해외 차입에 의존해 재정 적자를 메워야 하는 미국 경제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해외 차입을 줄이면 달러 가치는 추가로 떨어지고 투자 자금의 미국 탈출은 더욱 가속된다. 그러면 미국 금융 시장이 붕괴하는 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세계 경제에 핵폭풍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미국 전국경제연구소(NBER) 모리스 옵스펠드 경제 분석가는 “달러 가치가 앞으로 20%가량 떨어지면 감내할 수 있지만 40%까지 하락하면 큰 문제다”라고 말했다.

환율 전문가들은 미국이 엄청난 부메랑이 될지는 모르는 달러 약세를 당장은 즐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달러 약세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갚아야 할 빚의 실질 가치가 떨어져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이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회사 핌코의 폴 매컬레이 매니징 디렉터는 “자국 통화로 채권을 발행한 국가들처럼 미국이 달러를 평가 절하할 적절한 시기이다. 미국이 인플레이션으로 겪는 고통보다 다른 국가들이 통화 절상으로 겪는 고통이 더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달러 가치 급락은 치명적인 변수다. 이제 겨우 내수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와중에 달러 가치 폭락으로 발생할 세계 경제 혼란이 수출에 타격을 주어 경기 회복을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처럼 빠르게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기업의 채산성이 급격히 나빠져 ‘적자 수출’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모건스탠리 앤디 시에 아시아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달러 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져) 한국과 중국의 통화 가치가 크게 높아지면 한국과 중국은 ‘일본식 불황’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