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무전’ 수렁에서 가난한 죄인 구하기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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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국선 전담 변호사 제도 확대 추진 판·검사 출신 등 지원자 많아

 
이용렬씨(가명·27)는 ‘가난한’ 죄인이었다.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배운 것이 없어 공사판을 전전하며 목수 생활을 했다. 2004년 여름 이씨는 ‘오야지’(공사 현장 감독과 아래 인부를 중개하며 소개비를 받는 사람)였던 오 아무개씨로부터 임금 7백만원을 받기로 약속받고 일을 했다. 하지만 오씨는 끝까지 임금을 주지 않으며 만남을 피했다. 돈을 못 받은 이씨는 생계가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신세 한탄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다 오씨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근처에 있던 식칼을 꺼내 들고 “돈 내놔라” 하고 위협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이씨는 겁이 나 여인을 밀치고 도망을 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잡혔다. 법원은 징역 3년6월을 선고했고, 그는 현재 한 지방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뒤늦게 이 사건을 접한 국선 변호인 권성연 변호사는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실제 이씨의 범죄 내용에 비해 3년6월은 과한 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강도상해죄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는 이씨의 칼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던 이씨에게 몸이 밀린 피해자가 뒤로 물러서다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정도였다. 또 주량이 소주 한 병이던 이씨는 그날 2홉들이 소주 두 병을 마신 상태여서 법정에서 심신 미약 상태를 강하게 주장했다면 감형 받을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이씨는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가중 처벌될까봐 오히려 법정에서 이 사실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무엇보다 이씨가 만약 돈이 있었다면 피해자와 합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권변호사는 “만약 1심에서부터 변호사의 조력을 충분하게 받고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다면 전과가 없었던 이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1심 재판 때 변호사가 없었다. 이씨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공사판을 전전하지도, 돈을 받으려고 식칼을 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과연 현재진행형일까. 1988년 지강헌 사건을 다룬 영화 <홀리데이> 개봉과 함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다시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당시 탈주범들은 돈이 있는 사람은 빠져나가고 돈 없는 사람만 죄를 뒤집어쓴다며, ‘법은 있는 사람들 편’이라고 주장하다 자살했다.

이용렬씨의 사례는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무전유죄’를 외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전무죄’ 쪽도 마찬가지다. 최근 두산그룹 비자금 조성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용성·박용오·박용만 등 두산그룹 일가 4명은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회사 돈으로 3백66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이 중 3백26억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

재벌들의 ‘유전무죄’는 현재 진행형

이들은 비자금으로 유상증자에 참여해 지분을 늘렸고 세금을 냈고 생활비로 썼다.
 사찰에 시주도 했다. 또 이들은 회계 장부를 조작해 2천8백38억 원을 분식했다. 경제범의 특성상 증거 인멸의 우려가 높고, 해외 도피 등 도주 우려도 높은 상황이었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까지 불구속 상태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두산그룹 박용성 전 회장측은 법무법인 김&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두산 일가 사건을 맡은 변호인 가운데 두 명은 서울지방검찰청 출신이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경우 변호사 수임료가 수십억에서 1백억원대에 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과거 SK 최태원 회장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은 9백59억원의 부당 이득을 취하고 1조5천587억원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저질렀지만, 9개월 남짓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법원은 그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지난해 11월18일 노회찬 의원실이 변호사·판사·검사 같은 법조인 37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질문 내용은 ‘형사 재판이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거나 낮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였다. 이에 대해 ‘매우 공정하지 않다’라는 응답이 33명(9%), ‘공정하지 않다’라는 응답이 2백34명(64%)에 달했다. 법조인 73%가 형사 재판이 피고인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시인한 셈이다. 물론 전체 조사 대상 1천5백명 가운데 e메일 답변에 응한 사람들만 집계했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네 법 현실을 미흡하나마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다. 

“재범 고리를 끊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

‘유전무죄’ 현실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전유죄’가 갖는 폐해는 제도를 고쳐 그보다는 쉽게 개선시킬 수 있다. 가령 가난한 피의자도 국선 변호인의 조력을 충분하게 받을 수 있게 이를 강제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29일 정부는 국선 변호인 제도를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마련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따르면, 영장 실질심사 단계에 있는 모든 피의자와 구속된 피고인은 사선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경우 반드시 국선 변호인을 국가가 선임하도록 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적어도 돈이 없어 변호인을 못 구하는 비극은 막을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국선 변호 예산을 2005년보다 2배 늘린 3백50억원으로 잡았다.

 
국선 변호인 보수는 건당 13만원 정도로 일반 형사 사건 수임료에 비해 턱없이 낮다. 때문에 국선 변호인이 최선을 다해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곤 했다. 최근 법원도 국선 전담 변호사 제도를 확대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국선 전담 변호사란 일반 형사 사건을 전혀 맡지 않고 오로지 국선 변호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를 말한다. 2004년 9월부터 20명을 시범 운영했고 올해부터는 40~50명으로 늘린다. 1건당 수임료는 2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법원 사법정책실의 정준영 심의관은 “국선 전담 변호사를 모집했는데 예상 외로 많은 분들이 지원해서 놀랐다. 지금 2차로 모집 중인데 훌륭한 분들이 많아 선발에 무리가 없다. 무전유죄라는 말은 과거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원자 중에는 고위 판검사 출신도 많다고 한다.

이미 이런 제도의 수혜자가 생기는 것일까. 서기주씨(가명·53)는 국선 전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햇빛을 본 좋은 예다. 빈한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50대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했고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집안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서씨는 지난해 10월 사기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중 이경석 국선 전담 변호사(남부지법)를 만났다.

이경석 변호사는 보석을 청구해 서씨를 일단 석방시켰다. 이변호사는 서씨가 비록 사기죄에 가담했다고는 하지만 돈을 주범 OOO씨가 빼돌렸기 때문에 실익을 얻지 못했다는 점, 순진한 서씨가 OOO에게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들을 법정에서 강조했다. 이 점을 법원이 인정해 서씨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 이변호사는 “피고는 보석 청구를 하는 방법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국선 변호사·국선 전담 변호사 제도가 확대된다고 해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단박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국선변호를 9년 가까이 해온 권성연변호사는 “국선 변호사 제도의 개선과 별도로 재범 고리를 끊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 지금은 없는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 너무 없어지는 섬뜩한 세상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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