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토하듯 내놓는 일기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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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에세이 출간한 한대수·스왈로우 2집 낸 이기용 ‘공동’ 인터뷰

 
석 달 전쯤이었다. ‘소심한’ 기용씨가 큰맘을 먹은 때가. 여느 때처럼 포장마차에 앉아있던 그의 귀에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소주나 두 잔 마시고···.” 목소리가 걸걸하고 낮은 게 틀림없는 한대수였다. 한대수는 그가 존경하는 아티스트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는 먼저 노래부터 만든 후, ‘우상’이 사는 서울 신촌의 오피스텔로 찾아갔다. 스왈로우 2집 <아레스코>에 실린 듀엣곡 ‘어디에도 없는 곳’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기용씨의 스왈로우 2집 <아레스코> 발매와 한대수씨의 전집 앨범 <더 박스>·자전에세이 <올드보이 한대수> 출간에 맞추어 두 사람을 함께 불러냈다.

1월19일 저녁. 서울 홍익대 근처 곱창집에 들어서자 이미 술판이 차려져 있었다. 한씨가 거나한 표정으로 앉아 웃고 있었고, 한씨의 아내 옥사나와 이기용씨가 연신 소주잔을 부딪쳤다. 반백의 장발 위에 벙거지를 눌러쓴 낯선 인물이 한 사람 더 있었다. 그가 “카수가 하칩니다”라며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했다. “전인권과 강산에 앨범 프로듀서 했던 이예요. 일본인인데, 그냥 하선생이라고 부릅시다.” 한씨가 말했다. 하치 씨는 1990년대 초반 한씨의 3집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부터 한씨와 교유했다. 1997년, 한씨가 왕년의 일본 록 스타 카르멘 마키와 함께 후쿠오카에서 공연할 때 그는 무대에서 기타를 잡았다.

인터뷰 자리는 이내 코스모폴리탄 뮤지션들의 회식 자리같이 되어갔고, 자연스럽게 음악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둘이 함께 한 스왈로우 2집 <아레스코>가 첫 화제에 올랐다.

-노래가 보너스 트랙에 들어 있던데, 한대수씨의 노래가 마음에 안 들었나?
“배치상 그렇게 했을 뿐, 참 좋았다.”(이)
“멜로디가 이색적이라 부를 때 고생 많이 했다. 그런데 앨범 들어보니 좋더라.”(한)
이씨는 처음에 좀 당황했다. 녹음실에 도착한 한씨가 30분 동안 딱 두 번 부르고 그만하자고 했단다. ‘진지한’ 뮤지션인 이씨가 흡족할 리 없다. 하지만 한씨의 녹음 스타일이 그랬다. 지금껏 녹음실에서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불러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최대한 배려한 셈이었다. 한씨는 이른바 ‘천재과’다.
“난 노래 한 곡을 한 시간이면 만든다. 기분 좋으면 한 곡, 연애하다 보면 한 곡, 가사도 즉흥적으로 붙이는 편이고.”(한)
“그건 거짓말 같다. 행복한데 어떻게 노래가 나오나. 난 내가 바깥 세상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절망감이 들 때, 그럴 때 감정이 격해지면서 곡이 만들어진다.”(이)
“물론 실연했을 때도 만들지. 내 노래의 절반은 십대 때 만들었다.”(한)

-두 사람 모두 가사의 울림이 큰데, 멜로디보다 가사에 신경 쓰는 편인가.
“멜로디를 먼저 만든다. 노래는 몸으로 느끼는 거지 가사로 듣는 게 아니다.”(이)
“멜로디가 몸체고 가사는 옷이지. 그런데 요즘 가사는 너무 인스턴트적이어서 듣고 음미할 만한 게 많지 않다.”(한)
“그런데 그 앨범(스왈로우 2집) 레코드 가게에 있는 거야?”(하치)
하치 씨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자가 발전하던 인터뷰가 잠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작년에 그 앨범 평론가들 사이에서 베스트 10에 뽑혔어.”(한)
“그럼 잘 안 팔리겠네.”(하치)
“빙고.”(이)

-한국의 인디 음악을 어떻게 보나?
“허클베리 핀은 창의성 있는 좋은 밴드다. 크래쉬나 어어부밴드도 좋다. 좋은 음악은 많은데, 문제는 유통망이다. 우리도 빌보드 같은 국제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아시아의 음악 시장을 통합하는 방안도 있겠고···.”(한)

-문제는 인디 음악의 주류 시장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는 것 아닌가? 두 사람 모두 메이저 레이블에서 거절당한 경험이 있는데.
“나는 ‘밴드 멤버 다 바꾸고 네 노래만 쓰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씁쓸했다. 음악하지 말라는 것이지. 결국 자체 레이블을 만들어 직접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이)
“다시 음악을 하면서 고생 많았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까지 했지.”(한)

-대중가요의 장르 편식이 심한 것도 록 밴드들한테는 불리하지 않나?
“한국에서 한 해 동안 나오는 음반이 약 1천 장쯤 된다. 이중 8백 장이 댄스나 발라드다. 기타가 2백 장쯤 되는데, 그럼 시장 점유율이 20%가 되느냐. 겨우 1%밖에 안 된다. 그게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의 현실이다.”(이)
“그런가. 내가 무식해서 물정을 잘 모른다. 그러니까 록 밴드 해서는 화폐 냄새 맡기 힘들겠네. 하하하.”(한)

-한선생의 음악 뿌리가 포크인 줄 알았는데, 책을 보니 록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 같다.
“그 당시(데뷔하던 1960년대 말) 국내엔 음악인이 별로 없었다. 밴드 음악을 하고 싶어도 세션 구성이 어려웠지. 그래서 포크로 간 거다. 김민기·양희은 씨 등과 어울렸지만 음악적인 지향점은 전혀 달랐다.”(한)

-음악을 하는 이유가 뭔가.
“음악은 내 일기다. 매일 매일의 삶을 기록하는 거다. 어떤 이념도 목적 의식도 없다. 그냥 토하듯 내놓는 거지.”(한)
“이 말씀이 음악의 본질인 것 같다. 록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보통 가수들은 처음에 록을 하다가도 나이 들면 바꾼다. 하지만 선생님은 50대 이후에 록에 더 빠져드는 것 같다. 그래서 존경스럽다.”(이)

-음악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가?
“정치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음악의 역할은 인간의 본능적 감정을 움직인다. 그런 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한)
“내 생각은 다르다. 음악이 사회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을 도구로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이)

-수개월 전 한 펑크 밴드가 공중파 무대에서 옷을 벗는 사건이 있었다. 어떻게 봤나?
“펑크는 1970년대 유행인데 국내에 너무 늦게 들어왔다. 클럽에서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공중파에서 그런 것은 심했다.”(한)
“그 사람들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본의가 아니었다’라는 변명에 실망했다. 나는 그런 해프닝을 벌일 수는 있다고 보는데, 마무리가 잘못되었다.”(이)

-이기용씨는 현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록 버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선생도 재작년 <노동의 새벽> 앨범에 참여했는데.
“의뢰인으로부터 ‘외국에 5·18을 알리는 홍보 음악으로 쓰일 것’이라고 들었다. 기존 곡이 너무 유명해 고민이다. 가능하면 멜로디를 완전히 바꿔볼 작정이다.”(이)
“박노해 시인의 ‘겨울새를 본다’는 작품에 곡을 붙였다. 이주 노동자의 아픔을 노래한 시다. ‘이주 노동자’인 마누라가 러시아 노동요를 불러줘서 도움을 받았다. 하하하.”(한)

2년 전 한씨 부부가 서울로 이사한 후 옥사나(그녀는 몽골계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이다)는 ‘돈 못 버는 전업 뮤지션’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녀는 요즘 서울 강남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술을 연신 들이켜던 그녀, 대화가 소강 상태에 이른 틈을 타 메뉴판을 보며 “하트, 하트”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한씨가 주방에 대고 외쳤다. “여기 염통 하나 주이소.”

한대수는 호탕한 한량 같았고, 이기용은 진지한 서생 같았다. 술자리는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술상 구석에 술병이 수두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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