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물드는 황혼의 마을
  • 신호철 기자 · 박근영 인턴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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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타운 대중화 ‘가속도’…가격·시설 수준 ‘천차만별’

 
“날마다 밥 먹어라. 산책해라. 서예해라. 수영해라. 마누라 잔소리만큼이나 어지간히들 떠들디 않습네까?” 1월18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한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은빛왈츠> 대사 한 토막이다. 유료 양로 시설인 실버타운을 소재로 한 이 연극에서 할아버지 역을 맡은 주인공은 실버타운 안내 방송을 ‘마누라 잔소리’라며 불만이다. 하지만 역설적이다. 정작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옆에서 잔소리해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실버타운이 어디 사람 냄새 나는 곳입네까?”라며 투덜거리지만 정작 본인은 같은 실버타운에 입주한 이웃 할머니와 연애를 하고 젊은 경비와 술 한 잔 걸치며 ‘사랑이 꽃피는 실버타운’을 즐긴다. 실버타운은 황혼의 쓸쓸한 풍경이 가득하고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할라치면 입방아에 오르는 보수적인 곳이지만 외로운 노인들끼리 만나 정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연극은 실버타운이라는 공간의 양면성을 모두 보여준다. 실버타운 사람들을 취재해 극본을 썼다는 기자출신 권연순 작가는 “자식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다룰 공간으로 실버타운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실버타운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실버타운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연극의 소재가 될 정도로 친근해졌다. 환갑이 넘은 부모님을 모시는 자식이라면 한 번 쯤은 고민해보는 공간이 되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실버타운과 그 입주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3년에 35개소 2천3백69명이었던 노인복지시설 인구는 2004년 49개소 3천2명으로 늘어났다. 그 중 전형적인 실버타운인 유료 복지시설은 2003년 6개소 7백98명에서 2004년 8개소 1천43명으로 많아졌다. 2005년에 이어 거쳐 올해에도 실버타운 붐은 이어진다. 전라남도 전주시와 나주시·경상북도 성주군·전라북도 김제군 등 지방 자치 단체들이 너도나도 실버타운 혹은 은퇴 농장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일흔이면 청년이고, 여든이면 보통 사람, 아흔이면 이제 좀 노인이구나 하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실버타운 ‘유당마을’에 사는 이완순 할머니(82)의 말이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캐나다로 이민 간 5년 전부터 유당마을을 찾았다. 다른 실버타운도 알아보았는데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수원 근교인 이곳으로 왔다. 이완순 할머니의 친구인 최동주 할머니(78)는 “3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남양주에 혼자 살다가 몸이 나빠져 입원했다가 여기로 왔다”라고 말했다. 실버타운에서 만난 두 할머니는 죽이 맞는지 단짝처럼 늘 같이 지낸다. 두 사람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밥 먹고 산책하고 서예하고 운동하는’ 실버타운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유당마을에 살고 있는 입주자 96명 가운데 네 쌍을 빼고는 모두 ‘솔로’ 노인들이다.

분위기가 입주자 성격에 맞는지 고려해야

 
유당마을은 1988년 문을 연, 꽤 오래된 실버타운에 속한다. 역사만큼이나 입주자들도 오래된 사람이 많다. 평균 연령이 82세로 다른 실버타운보다 높은 편이다. 이곳에는 1백1세가 되는 할아버지도 있다. ‘백세’ 할아버지를 만나러 B동 방문 앞에 섰다. “왜 그래?” “할아버지 잡지사 기자가 왔는데 인터뷰하시겠어요?” “아, 나 그런 거 안 좋아해.” 할아버지는 귀찮다는 듯 사회복지사의 부탁을 거절했다. 문 밖으로 들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우렁차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는 7년 전에 유당마을에 왔다고 한다. 이 실버타운에는 14년째 살고 있는 할머니도 있다. 이 할머니에게 실버타운은 집이며 고향인 셈이다.

실버타운 입주를 고려하거나 부모님을 실버타운에 보내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고려하는 부분은 보증금과 생활비다. 유당마을의 경우 보증금은 5천만~1억5천만 원 정도. 월 생활비(관리비)는 100만원가량 든다.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유당마을 입주자들은 ‘부자 노인네들’로 소문나 있지만, 그래도 용인의 삼성 노블카운티에는 크게 못 미친다. 삼성 노블카운티 입주 보증금은 3억원에서 10억원에 이르며 입주자들은 주로 전직 의사·변호사를 비롯해 전직 장관 ·총리·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화려하다.
좀더 대중적인 실버타운으로는 보증금 2천만원에 월 관리비로 50만~60만 원을 내는 새생명 실버타운, 보증금 1천5백만~2천9백만 원 수준의 김제노인 전용 복지주택 등이 있다. 요즘 몇몇 실버타운은 경영을 잘 못해 부도를 맞기도 했다.

실버타운 입주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가 가격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실버타운은 ‘노인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 사는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실버타운 안에서도 일어난다. 실버타운 분위기가 자신의 성격이나 사교성과 잘 어울리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경기도의 한 유명 실버타운에 입주한 한 할머니(72)는 “이곳이 시설은 좋지만, 자기들끼리만 친하고 나 같은 사람은 어울리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다른 실버타운에 아내와 함께 사는 홍아무개 할아버지(84)는 “입주한 지 석 달이 지났는데 아직 친구가 한 명도 없다”라고 말했다.

 
어디나 그렇듯이 실버타운의 삶도 양면성이 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롭지만 적극적인 사람은 실버타운 안에서도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 연극 <은빛왈츠> 같은 ‘실버타운 로맨스’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2005년 가을에 노길희·박일연 교수가 발표한 논문 <양로시설 입소 노인의 성과 생활 만족도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 중 4%는 ‘가까운 친구’와 성관계를 맺고 있다. 경기도 ㅇ실버타운의 사회복지사는 “우리 실버타운에 살다 서로 좋아져서 사귀게 된 경우가 최근 세 쌍 정도 있었다. 하지만 다 나가시고 지금은 한 쌍만 남았다. 대화가 일상의 전부인 할머니들 사이에서 연애담은 입방아 거리가 된다”라고 말했다.

‘사랑이 꽃피는 실버타운’은 부부 관계에도 적용된다. 경상북도의 한 실버타운에 사는 박진원씨(가명, 70대) 부부가 좋은 예다. 남편 박씨는 교사로 평생을 살다 50대에 은퇴했다. 지난해 부부는 사이가 나빠져 이혼 직전까지 갔다. 4개월 전 실버타운에 들어올 때 부부는 차 2대에 나눠 타고 다른 동에 입주해 별거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이 부부는 실버타운에서 각방 생활을 하는 동안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식사 시간마다 같이 밥을 먹고, 서로 관리비도 내준다. 서로의 뒤치다꺼리를 해주지 않아도 되어, 독립적인 부부 관계와 생활이 가능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버타운, 그곳에는 노인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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