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달리던 기아차 ‘덜컹덜컹’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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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수출 급격히 악화해 고전…경영권 승계에도 비상등 켜질 가능성
 
기아자동차가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있다. 양 날개인 내수와 수출이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2등 자리를 GM대우차에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경영진은 인사고과가 좋지 않은 직원을 퇴직시키려 했다가 노동조합이 반발하자 물러나 체면을 구겼다. 그런가 하면 유럽 시장 공략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슬로바키아 공장도 암초를 만났다. 슬로바키아 정부가 기아차 현지 부품업체 투자비로 10~14%를 보전하겠다는 당초 약속을 취소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슬로바키아 정부가 이 약속을 취소하면 기아차는 1천7백만 유로(약 2백억원)를 대납해야 한다.

기아차는 ‘황태자’ 정의선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본부 사장이 지난해 3월 대표이사로 취임할 때만 해도 회사 안팎에서 제2의 도약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유럽 시장 공략 거점인 슬로바키아 공장이 지난해 5월 파일로트(시범) 생산을 시작했는가 하면 지난해 11월에는 5년 만에 중형차 로체를 시장에 내놓았다. 슬로바키아 공장에 이어 북미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중국과 함께 세계 최고 성장 시장으로 꼽히는 인도에도 공장을 세우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기아차는 이제 세계 시장에서 ‘쾌속질주’하는 현대자동차와 함께 고속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지난해 9월 기아차는 이런 장밋빛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수 판매 대수가 전달에 비해 18%나 급감했기 때문이다. 월 판매량이 2만2천~2만4천 대에서 1만8천대까지 줄어들었다. 수출 물량도 지난해 8월 7만대 밑으로 떨어지더니 지난해 9월에는 5만1천7백91대까지 내리 꽂혔다. 연말에 밀어내기 방식으로 판매율이 다소 나아지는가 싶더니 올해 들어 다시 추락하고 있다. 지난 1월 기아차 내수 판매 대수는 1만7천5백26대로 지난해 12월보다 9천5백대가량 줄어들었다. 수출 물량도 8만7천3백98대에 불과해 지난해 12월보다 1만3천7백76대나 적었다. 올해 2월 판매 실적은 처참한 수준이다. 2월은 전통적인 비수기인 데다 날짜 수도 적어 월별 기준으로 사상 최악의 실적을 거둘 것으로 추산된다. 

내수 실적이 악화한 주범은 로체. 중형차 로체는 기아차가 지난 5년 동안 개발비 2천7백억원을 쏟아부어 내놓은 야심작이었으나 당초 기대와 달리 팔리지 않고 있다. 막 출시한 지난해 11월 5천1백66대가 판매되었으나 12월 3천7백21대로 줄었고 급기야 지난 1월에는 2천2백54대까지 떨어졌다. 올 2월에는 판매가 쏘나타(현대차)·SM5(르노삼성차)·토스카(GM대우차)보다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체의 판매가 부진한 데에는 이 차가 준중형차 아반떼XD 후속 차종(코드명 HD)의 플랫폼을 늘려서 만들었다고 알려진 것이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보유세를 높이자 SUV 수요가 크게 줄었다. SUV 판매 비중이 높은 기아차에게는 치명타였다. 지난해 기아차의 승용차 내수 판매 가운데 SUV가 차지하는 비중은 53.8%나 된다. 더욱이 현대차가 지난해 11월 싼타페 신형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기아차의 베스트셀러인 쏘렌토 판매가 타격을 입었다.

기아차는 내수 판매를 늘리고자 ‘판매 할당제’까지 도입했다. 사원·대리급은 4대, 과장 8대, 차장 16대로 한 해 판매 수량을 할당하고 매월 시상하고 있다.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판매 실적이 직·간접적으로 인사고과로 이어지리라 예상되면서 울며 겨자 먹기식 판매가 나타나고 있다. 기아차의 한 관리직 사원은 “인사 고과에 반영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 얼마 전 인사고과가 좋지 않은 직원을 쫓아내려 한 적이 있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할당량을 채우려고 한다”라고 전했다. 올해 승진 대상이거나 고과 점수가 낮은 일부 직원은 영업점 직원에게 웃돈을 주고 실적을 사들이기도 한다. 현대차 영업소의 한 지점장은 “현대차 영업 직원의 20%도 한 달에 한 대도 못 판다. 일반 관리직 간부가 한 달에 한 대 이상 판다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했다. 그 탓인지 할당 판매가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 “일시적 부진일 뿐” 낙관

내수 부진보다 심각한 것은 수출 부진이다.  원화 강세가 이어지면서 세계 시장에서 기아차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채산성은 나빠지고 판매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아차는 다른 국내 자동차 업체처럼 수출 비중이 내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내수 판매량보다 네배나 많은 차를 수출하고 있다. 또 중국 합작법인을 제외하고는 생산공장이 국내에 몰려 있다. 환율 변동으로 인한 충격을 누그러뜨릴 완충 장치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보니 원화 강세로 인해 기아차가 입는 상처는 그만큼 넓고도 깊다.

기아차 실적 부진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조만간 성장 궤도로 돌아올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김학주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로체와 카니발의 해외 판매가 올해 2~3월 본격화하고 올해 3월 나올 카렌스 후속모델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 업체는 한 차종만 잘 팔려도 수익성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기아차 품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기아차의 미래를 낙관하게 한다. 올해 4~5월 자동차 전문지 <JD파워>나 소비자 잡지 <컨슈머리포트>가 잇달아 기아차 품질에 대해 호평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슬로바키아 공장이 올해 10월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환율 변동으로 인해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데다 유럽형 준중형차(프로젝트 ED)를 본격 양산할 수 있다. 내년 6월 스포티지까지 양산하기 시작하면 기아차는 생산 설비가 완전가동 상태로 진입한다.

정의선 사장이 정몽구 회장(MK)으로부터 무리 없이 경영권을 승계 받으려면 국내 최대 자동차그룹을 이끌 능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정사장은 현대·기아차그룹 주요 계열사 주식 소유 지분율이 매우 적다. 따라서 언젠가 MK 소유 지분을 상속받거나 글로비스나 엠코 지분을 팔아 시장에서 주요 계열사 지분을 사들여야 한다.  기아차 실적 부진이 지속되면 주주와 시민단체 사이에 자질론이 불거지면서 경영권 승계 과정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단지 기아차 차원에 그치지 않고 현대·기아차그룹 전체의 고민거리로 비화한 기아차 실적 부진을 타개하는 데 승부수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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