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치부’ 숨기고 망언 일삼는 외무장관
  • 시즈오카 · 크리스토퍼 리드(언론인) ()
  • 승인 2006.02.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소 타로 집안, 조선인 강제 징용자 1만2천명 혹사시켜

 
일본은 자기네가 전시에 이웃 나라에 행한 만행과 잔인하고 적대적인 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는 커녕, 이같은 행위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은 최근 실패로 돌아간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시도에서 또 한 번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국 베이징의 도쿄·평양 당국자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기 며칠 전, 일본 외교관들이 강조하고 일본 언론이 연일 부각시킨 ‘최우선’ 순위는 1977~1983년 사이 자행된 일본 국민 최소 15명에 대한 불법적 납치 문제의 해결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인 한국인 100만명 이주와 일본 산업체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노예 상태에서 강제로 부역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더 놀라운, 그리고 선진국의 현대적 정치 기준으로 볼 때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일본 외상이자 귀족주의자 아소 타로의 가업이 이같은 추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인은 약 1만2천명이 일본 규슈 지방의 아소 회사 소유 탄광에서 노예 상태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 회사는 아직도 아소 가문 소유이며, 올해 65세인 아소 장관은 한때 이 회사 사장을 지냈다.

1930년대 초반부터 1945년까지 한국인들의 이같은 강제 징용 사실은 일본 언론이 언급하지 않으며, 정치인들도 논평을 꺼리고 있다. 사실 많은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이를 알고 있는 극소수 사람들은 당시의 노동이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치부하기 일쑤다.

100만명에 이르는 한국인 또는 그들 가족의 어느 누구에게도 금전적 보상을 하지 않았다. 아소의 경우 또한 자신은 물론 아소 회사 직원 그 누구에게도 이같은 추악상에 대한 논의를 허용한 적이 없다.

아소의 최근 발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주의적 팽창과 해외 전쟁에 대해 일본의 국가적 사죄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그 자신이 공감하고 있음을 빈번하게 내비치고 있지만, 한 세대가 지났다고 해서 가문의 치부가 가려지거나 자신이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소의 다양한 발언은 또한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인 정서에 대한 그의 불감증을 보여준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아소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명,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그리고 하나의 인종으로서 지구상에 다시 없는 예’로 일본을 묘사함으로써 1930년대 파시즘 논리를 되풀이했다.

그는 1973년부터 정계에 입문할 때인 1979년까지 일본 규슈 지방 후쿠오카 현에 있는 아소시멘트(옛 아소탄광)를 운영했다. 이 기간에 그는 한국인 노예 노동에 대한 회사의 더러운 유산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 드러내

 
아소는 현재에도 회사 일에 간여하고 있다. 2001년 아소시멘트는 프랑스의 시멘트 업체 라파르주와 합작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이 기업은 그의 동생 아소 유타카가 경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도쿄 주재 프랑스 대사는 아소 외무장관과 그의 처 치카코가 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유타카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이것은 일본 최근세사의 귀족주의적 전통에 흠뻑 젖은 한 가문의 품격에 어울리는 선물처럼 보였다. 아소 가계는, 수세기에 걸친 쇼군 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 근대를 연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이끈 5명의 귀족적 사무라이 중 한 사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 다카키치는 1872년 아소탄광 회사를 차렸으며, 한때 규슈 지방에서 매장량이 많기로 유명한 치쿠호 탄전에서 탄갱 여덟개를 소유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검은 다이아몬드’ 절반을 생산하는 지역의 3대 가문 회사 중에서도 단연 최대로 꼽혔다.

아소는 대지주 부호의 후예답게 전통적으로 일본 황족을 교육시키는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 런던 대학에 수학했으며, 당시의 아소산업에 들어가자마자 이사가 되었고 곧 최고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일본 사격 대표 선수단의 일원이 되어 가문의 귀족주의 전통을 완성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요시다 시게루다. 요시다는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일본 수상을 역임했다. 그는 1950년대에 탄광 노조의 ‘빨갱이들’을 일소한 귀족주의적 보수주의자로 아소 가문에는 안성맞춤인 인물이다. 아소의 부인은 (보수)자민당 출신 일본 총리(1980~82)를 지낸 스즈키 젠코의 딸로 가문의 영향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아소 가문은 황족과도 연결되어 있다. 아소의 누이 노부코는 마사카궁의 도모히토 왕자와 혼인했는데, 그는 천황의 사촌으로 최근 여성도 국화관(일본 천황가의 상징)을 차지할 수 있게 허용하자는 제안에 반대해 언론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던 인물이다. 도모히토는 후궁제를 통해 부계(父系)을 잇자고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일본을 수세기 전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황실 전통이다.

아소의 강제 노동과의 관계-공식 웹 사이트에도 언급되지 않은-는 하야시 에이다이, 오노 다카시, 후쿠노메 노리아키 등 후쿠오카의 향토 사가 3인에 의해 추적되었으며, 이들은 재일 한국인 김관열씨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 네 명은 충격적인 내용을 보여주었는데, 대부분은 저서를 통해 활자화되었다.

일본에 편입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모든 식민지 백성을 강제 노동시키도록 한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은 1939년에야 통과되었다. 하지만 향토 사가들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조선의 노동자들이 아소탄광으로 보내진 사실을 발견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규모는 특히 1932년 아소탄광에서 광부 4백명이 파업을 벌인 이후로 수천명에 이르렀다.

1939년 이후 일본에 보내진 조선인 강제 징용자는 100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정확한 숫자는 1백12만명. 일본측이 발표한 공식 숫자는 72만4천2백87명이다.

아소탄광 조선인 징용자 61.5% ‘탈주’

1만2천명에 이르렀던 아소탄광 광부들은 군사적 목적으로만 독점적으로 공급되는 석탄을 채굴하며 일본인 광부들이 받는 급료의 3분의 1을 지급받았다. 이는 월 50엔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식량·의복·주택 용도의 비용과 미혼 노동자에 대한 강제 저축분을 의무적으로 징수당하고 나면 10엔 이하로 떨어졌다. 젊은 미혼 남성들은 잦은 탈주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급료를 차압당했으며, 그나마 ‘저축분’도 지급받지 못했다. 모든 노동자는 공휴일도 없이 하루 15시간씩 일주일 내내 지하 작업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주거’ 또한 제한되었으며, 건물 한 동에 비좁은 방이 예닐곱 개 붙은 불결한 숙사(宿舍)에서 생활해야 했다. 미혼 남성들은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다다미 자리에서 혼자 숙식했다. 난방은 물론 수돗물도 공급되지 않았다. 화장실은 맨땅에 구덩이를 판 것이 고작이었다. 3m 높이로 목책 담장을 둘러치고 끝에 전기가 통하는 철사를 바깥으로 휘감았다. 노동자들은 경찰 경비원에 의해 감시받는, 죄수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향토 사가들이 입수한 자료 가운데에는 경찰 통계도 있다. 1944년 3월 아소탄광에는 모두 7천9백96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56명은 ‘최근 사망’했고, 4천9백19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탈출했다. 후쿠오카 지방 전체의 도망자 비율은 51.3%였으나 아소탄광의 경우는 61.5%였다. 후쿠오메 씨는 이를 ‘작업 조건이 더 열악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영양 실조에 시달렸다. 매달 한 번씩 한줌의 쌀을 지급받는 게 고작이었다. 육류는 전혀 공급받지 못했다.

사망자들의 사정은 어떠한가. 1960년대 말에 문을 닫은 아소탄광이 있는 치쿠호 지역에는 호코지라는 절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절의 한 스님은 한국인 사망자 유해가 묻힌 이름 없는 무덤 수백 기를 보살피고 있다. 향토 사가들에 따르면, 이밖에도 수백 기의 표시 없는 무덤이 흩어져 있다.

재일 한국인 강제 징용자 문제는 2004년 한국 의회가 단 한 건의 이의 신청을 빼놓고 일제하 강제동원 진실위원회(회장 전기호)를 구성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2005년 초 조사에 착수해 16개 지방 2백34곳(한국)을 여행하고 증언을 청취했으며, 관련자로부터 증거를 수집했다. 전박사는 그가 대담하게 ‘만행(atrocities)’이라 부르는 것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강제 징용자들을 착취했거나, 사망자 유해의 행방을 알 것으로 여겨지는 2천6백개 일본 기업 명부를 작성했다. 바로 이 명부에 유독 눈에 띄는 회사 이름이 들어 있다. 바로 아소탄광이다. 그러나 이 회사 대변인은 회사가 유해 행방을 조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만약 한다손 치더라도’ 기록이 없다고 덧붙였다. 대변인 후지모토 아키라는 “당시 규수 지방에는 많은 탄광 회사들이 있었으며, 모두 강제 징용자를 고용했다”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아직 보고서를 내놓지 못했다. 지금까지 일본 언론은 거의 전적으로 이같은 진행 과정을 모른 체해왔고 아소 타로는 진실 규명 작업이 있는지조차 망각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소 가문의 추문은 미해결된 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소 타로 장관은 정직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하다’라고 사설은 쏘아붙였다. 왜 그런가. 과거 일본 군국주의 시대와 식민주의,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범죄에 대한 그의 격한 발언이 모범을 보여야 할 금도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에 행한 아소 타로 장관의 문제성 발언 두 개를 들추어냈다. 그 중 하나는 일본 천황도 ‘14명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이완의 높은 교육 수준이 과거 일제의 50년에 걸친 지배의 결과였다고 말한 대목이다.

뉴욕 타임스의 지적 가운데에는 ‘일본의 공론과 학교 교육이 한국인 강제 징용 및 성 노예화, 생물 무기 생체 실험, 난징 대학살 같은 전쟁 범죄에 대해 적절히 책임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들어 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사설에서 아소 타로 장관이 외교와 역사 감각 두 측면에서 모두 문제가 심각하다고 논평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