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보이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 천정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
  • 승인 2006.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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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무슨 책을 내든 1쇄 2천권을 못 팔아 아우성인데, 이처럼 ‘조중동’이 모두 나서서 한 마음으로 열광하며 밀어준 책이 또 있을까? 그것도 ‘전문가’들이 쓴 일종의 학술서적인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에 대한 소란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가 얼마나 중요한 투쟁의 장(場)인지 또다시 일깨워 준다. 이 투쟁은 일종의 ‘기억 투쟁’이며 ‘지금-여기’서 벌어지는 보수-진보 간의 이념 투쟁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이 있는 한, 또는 박정희의 딸과 김일성의 아들이 권좌에 버티는 한, 이 투쟁의 도가니는 쉬지 않고 들끓을 것이다.

문화사 연구자인 필자는, 식민지 시대와 현대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 중에 교정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북한의 역사 인식이나 학계 일부의 민족만능주의가 이제 눈 뜨고 보기 어려운 폐해라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재인식>에 실린 논의의 약 5할 이상은 기억할 만한 중요한 학문적 성과이며, 이 책에 참여한 학자 중에는 이른바 ‘뉴라이트’라는 변종 보수 우익과 전혀 무관한,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 박지향·이영훈 교수가 <재인식> 편저의 동기를 밝힌 서문과 첫 번째 논문을 읽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지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는, 평소에 절대 안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상투적인 문장이 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이들이 남들에게 해댄 비판을 그대로 그 자신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이 글에서 ‘교수님들’은 독선에 빠진 학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으며, 후안무치하기까지 해서 결국 책의 의의를 망쳐버렸다.

책은 시작하자마자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걸고 넘어진다. 또한 학계에서 ‘원로’로 존경 받는 강만길·최장집 교수를 콕콕 집어서 비판한다. 어찌됐든 일단 큰 놈을 찍어 넘겨야 나도 클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인정 투쟁의 전술이 사용된 것이다. 박지향·이영훈 교수는 정치에 무감각한 책상물림이나 바보가 아니다. 노정권이 얼마나 많은 ‘위원회’를 만들어 ‘과거사청산’에 몰두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렇게 글을 쓰면 조선일보 데스크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잘 계산했을 것이다. 진정 신중하고 비정치적인 사학자라면 자기 이름이 ‘노무현’과 이렇게 많이 함께 검색되는 기사가 만들어지게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나온 사서 중에서 이처럼 정치적인 책이 또 있었을까?

겉으로는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다면서…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면서, 자신이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식의 ‘뺑끼’를 친다는 것이었다. “사학자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아야”하며 “아웃사이더”여야 한단다. 자신은 한갓 실증 사학자일 뿐인데, 다른 학자는 역사를 입맛대로 왜곡하는 이데올로그라고 한다.(1권 35~36쪽) 객관성이니 학자의 자세니 운운하지말고, 그냥 좀 솔직해지면 안 되나. 나, 보수 우익의 스피커로 왕창 크고 싶다고. 그리고 일류 인생만 살아온 나, ‘역사’의 ㅇ도 모르는 무식한 상고 출신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역사’를 입에 올리는 꼴이 끔찍하게 싫다고.

언제부터인가 조갑제 같은 파시스트로부터 뉴라이튼가 뭔가까지, 기득권 세력이 ‘우익’의 이름으로 ‘준동’한다. 이전에는 ‘내가 우익이다, 우짤래’하고 나서는 후안무치는 없었다. 과거의 ‘우익’은 부패와 반인권, 반민주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익은 그저 과거로부터 전습된 ‘꼴통’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민주정부’라는 큰 나무의 그늘에서 새로 자란 독버섯이겠다. 브레이크 없는 신자유주의와 북한의 허약함이 독버섯을 키우는 거름이 된 것이겠다. 전쟁·빈곤에 대한 기억을 가진 세대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도 우익은 꾸준히 충원되고 있다. 한편으로 <재인식>은 한국 국사학계의 안일하고 오래된 ‘오소독스’를 파고든 우익의 칼끝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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